공무원들의 사기가 이만저만 떨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80년대 이전의 공무원은 권위가 있었다. 주민들에게는 모범의 전형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신용을 인정받는 KS 품질 보증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문에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공무원 가족이라면 존경과 믿음을 전제로 대하거나 거래를 했다. 관료주의 낭만시대 이야기다.
90년대 이후 주민자치와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공직사회는 그야말로 동네북이됐다. 시민의식이 급성장하고 신분의 척도가 부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되면서 공무원은 시민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고 심부름꾼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원이 발생하면 시민들은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 집단으로 목청을 높이는 영악한 지혜를 터득했고 시청과 군청으로 몰려와 시정잡배들과 다를바 없는 몰상식으로 공무원을 폄하하고 비난한다.
언어의 폭력이자 정신적 폭력에 휘둘리면서도 맞대놓고 하고싶은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요즈음의 공무원이다.
주민자치의 뿌리인 의회도 공무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상전이다. 행정사무감사나 시정질문이 열리는 날이면 공무원들은 입맛이 떨어지고 아랫배가 살살 아프다고 하소연한다.
대의기관인 의회의 기능이 점점 탄력을 받으면서 공무원들의 설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그러니 “공무원 해먹기 힘든 세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공무원 해 먹기 힘든 세상이야 말로 공무원들의 세상일 수가 있다. 60~70년대 관료주의 특권의식은 버려야할 병폐가 맞다. 향수에 젖었다가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떳떳하면 당당할 수 있고 주눅들 일도 없다.
그러기에 공무원 스스로 시민에게 큰소리 칠 수 있고 의원에게는 소신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굴원(屈原)이 초나라 삼려대부직에서 쫓겨나 강가를 떠돌다 만난 어부와의 대화는 요즘의 공직사회에 뜻하는 바가 많다.
어부가 굴원의 초췌한 형상을 알아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굴원은 “남들이 흐릴지라도 나 혼자 맑으려 했다. 남들이 모두 취할지라도 나 혼자만은 깨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쫓겨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부가 “남들이 흐리면 같이 흙탕물을 들치고, 남들이 곤드레하면 같이 술찌끼를 씹으며 묽은 술마저 마시지 그랬는냐”면서 “왜 당신 혼자 고상한척 하다 쫓김을 당했는가?”고 비웃는다.
이때 굴원의 대답이 걸작이다.
“강물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내 눈송이 같은 결백으로 세상의 먼지를 둘러쓰겠는가?”
굴원의 정신이야 말로 정체성 상실과 무기력해진 공직사회에 당당함과 활기를 심어주는 좌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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