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로 길들여진 사회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고 살아간다. 길지 않은 인생 길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편히 기댈 수 있는 이웃을 만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인생이 무엇인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너와 나의 만남에서 아름다움과 감격과 기쁨과 고뇌까지도 함께 하며 그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 교제이며 거기서 두터운 우정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네가 없이도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젖어들면서 너와 나의 관계는 황량한 사막에 나뒹구는 가시덤불처럼 메말라진다.
하루를 살아도 너의 아픔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넉넉함은 없고 시오지심(猜惡之心)과 시약불견(視若不見), 즉 샘을 내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고난 받는 이웃을 못 본 체하며 살아가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사회는 더욱 어두움이 짙어 가는 것이다.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이르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입 속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지녔다는 뜻의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의 삶에는 아름다운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 황폐한 마음과 치졸한 생각이 치료되고 너와 더불어 살아감의 의미를 체득하여 더욱 훈훈하고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아름다운 만남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일체성불(一切成佛) 사상이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과 긍휼의 마음으로 너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나의 삶을 가리킨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랑과 희생, 진리의 교훈이나 공자가 가르친 강의목눌근인(剛毅木訥近仁) 정신이 인간관계에서 최고의 만남을 이루는 덕목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정한 자기와의 만남을 지각(知覺)할 때 너와의 만남이 아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삶이 실천되며 거기서 탐진치(貪瞋癡)가 사라지는 것이다. 탐(貪)은 탐욕이며, 진(瞋)은 노여움이요 분노이며, 치(痴)는 무명(無明)이요 우치(愚痴)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탐진치 때문이다.
일상의 만남에서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넉넉함과 훈훈함으로 살아가는 법리(法理)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깊고 넓은 삶의 지혜가 있는 깨우침이 ‘시호명명 청호무성’(視乎冥冥 聽乎無聲)이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이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들리는 것을 듣는 귀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소리, 양심의 소리, 영혼의 소리, 지혜의 소리, 하늘의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다. 이것은 마음의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이기주의와 편견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삶의 장에 시호명명 청호무성을 경험하는 것은 지고한 인생공부요 생활 철학이다.
요즈음 들어 막판 장터같이 되어 가는 듯한 청와대와 여의도 1번지의 현장을 전해 주는 언론 보도를 보고 들으면서 소위 정치 9단들의 만남도, 정치 초단의 만남도 시정잡배만도 못한 의리 없고 신의 없는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에서 시작된 만남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질서와 윤리의 사표가 되어야 할 언론과 종교의 모습도 하나같이 편견과 이기주의에 길들여진 듯한 현상이 곳곳에서 연출되는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는 미소지으며 다가가다가도 내 소욕을 이루고 나면 어김없이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은 치졸한 소인배의 방식이다. “모든 것은 남을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했다”는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정치도 사회도 아름다운 만남을 통한 훈훈한 삶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