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광 식 <경주중학교 교사>

지난 달 중순,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함박눈이 내렸다. 아침엔 비가 내리더니 시간이 지나자 간간히 눈도 섞여 내렸다. 1교시 수업이 없어 교무실 창밖을 바라보니, 비보다 눈이 더 많이 내렸다. 결국 오전 10시가 지나서는 본격적인 진눈깨비에서 함박눈이 되어 내렸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감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봄날에 보기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어 행복하였다. 2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아이들도 들뜬 마음으로 수곤거리고 설레는 표정으로 밝아 보였다. 난 책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 속으로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관찰해 보며, 수업하는 것이 참 의미있을 것 같았다.

각자의 눈빛으로 마음으로 자신만의 감상을 여러 친구들에게 발표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남쪽창가로 모여, 넓은 운동장으로 시선을 모으며 눈(目)으로 눈(雪)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마냥 행복해 하고 있었다. 아늑한 안압지와 반월성, 침묵의 황룡사지, 설화의 거목 계림, 신라의 성지 남산이 쫙 펼쳐 보이는 천 년 고도의 숨결을 바라보는 행복은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봄하늘에서 함박눈이 끝없이 내리는 순간을 보고 느낀 후 발표할 기회를 주었다. 한 학급 35명의 학생들 모두가 한결 같이 희망적인 목소리요, 밝은 느낌을 받았다는 내용의 발표였다. 그것은 위대한 자연의 고귀한 선물이리라. 물론 눈이 내려 피해를 입고 삶에 어려움을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모든 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하는 얼굴들 뿐이었다. 나 역시 백지의 하늘에서 어찌 저런 아름다운 눈꽃들이 저리도 내릴까 생각하며 말문을 닫았다. 마치 한 송이 한 송이가 우리들의 인생 같기도 하였다. 어디선가 태어나서 열심히 살아서 꿈꾸며 내려와 벗을 만나고 외롭게 기쁘게 함께 더불어 살다 봄의 대지에 흔적없이 자취를 감추는 그들의 삶은 진정 깨끗해 보였다. 어떠한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마른 봄의 대지에 녹아 스며들고 생명의 입김이 되고 있었다. 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저렇게도 누군가를 위해 쉼 없이 주기만한 사랑. 자신의 잘난 모습도 아름다운 모습도 말하지 않은 채, 하나의 작은 몸짓만 남기고 어떠한 존재의 조건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지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이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행동가인 버트란드 럿셀의 인생론에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계산적 심리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계산된 애정은 진정한 애정이 아닐 뿐더러 받는 사람이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헌신적 사랑으로 키우고 계시지만, 후일에 자식에게 대가를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사랑을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일선 교단에 몸담고 계시는 선생님들도 아마 그와 다를 바는 아니라고 본다. 오직 제자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지, 제자에게 무언가를 바라는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나 부자간, 사제간의 사랑도 아마 그와 같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나 역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리라. 비록 나의 짧은 식견들이 앞을 가릴지언정 두려워하지 않고, 함박눈송이처럼 차곡차곡 내려 대지에 스며들 것을 다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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