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영일 냉수리 신라碑’ …그 수수께끼를 푼다

수수께끼의 국보가 포항시 신광면에 있다. 가장 오래된 신라 석비다.
그 높은 가치만큼이나 숱한 수수께끼에 휩싸여 온 ‘영일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 264호).
2002년 새아침, 이 국보의 오랜 비밀의 문을 연다.
석비(石碑)의 태반은 왕들의 행적이나 사찰관계 기념비들이다. 그러나 이 신라비는 한 개인의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에 관한 공문을 기록한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뒤·위 3면에 소박하게 새겨진 231자의 한자 무더기. 그 행간에서 떠오르는 고대의 드라마가 우리를 설레게 한다.
때는 6세기 초, 신라가 새로이 나라의 체모를 갖추어 날개짓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도읍 서라벌(지금의 경주) 북쪽 50리에 있는 신광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그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새겨 놓은 것이다. 비문의 내용부터 간략하게 소개해 보면….
“신라 실성왕(實聖王·제18대·402~417년)과 내물왕(奈勿王·제17대·356~402년) 두 임금이, 일찌기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물 취득을 인정하는 명을 내린 바 있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25일 지증왕(智證王·제22대·500~514년) 등 신라의 각 부 대표 7명이 논의하여 이 같은 두 임금의 조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바이다.
또한 절거리가 죽은 다음엔 대를 이어 그 집의 아들 사노(斯奴)에게 이 재산이 상속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두 사람은 재물 취득에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중죄에 처할 것이다. 중앙관서의 전사인(典事人) 7명과 지방의 촌주(村主) 2명이 교시를 시달하고, 소를 잡아 제사 지낸 다음 이 사실을 기록한다.”
요컨데, 4세기와 5세기의 왕명을 6세기 초에 이르러 다시 확인한 공문이다.
여기서 몇가지 강한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절거리란 자에게 소유하도록 한 ‘재물’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길래, 역대 신라왕과 당대의 권력자들이 줄줄이 나섰는지 마냥 궁금해지는 것이다.
당시의 경제 개념으로는 토지는 재물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절거리의 재물’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신라비에 얽힌 최대의 수수께끼다.
둘째, ‘절거리’라는 인물에 관한 의문이다. 내물왕대와 실성왕대를 거쳐 지증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백여년을 살아 온 그 ‘이상장수(異常長壽)’가 의아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절거리’는 한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를 이어 불린 직명(職名)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렇다면 ‘절거리’란 무엇을 뜻하는 직명일까.
셋째, 재물 상속자에 대한 의문이다.
비문에 의하면 상속자는 ‘제아사노(第兒斯奴)’로 규정되어 있다.
이 대목의 ‘제(第)’를 한자의 본래 뜻대로 ‘이어서…’, ‘저택’, ‘오직’이라 새기고, ‘오직(그 저택의)아들 사노’라 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제(第)’를 ‘제(弟)’의 별기(別記)로 보고 ‘동생 아사노’ 또는 ‘동생의 아들 사노’로 해석할 것인가. 상속자는 과연 누구인가. 또한 ‘사노’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신라비가 출토된 것은 1989년. 10여년이 넘도록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이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삼국사기’에 있다.
고려 인종 때(1145년) 엮어진 ‘삼국사기’의 잡지(雜志) 지리(地理)편엔 우리나라의 옛지명이 즐비하게 실려 있는데, 신라비가 출토된 신광의 이름도 보인다. “신광현(神光縣)은 본시 동잉음(東仍音)현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제35대·742~765년)이 신광으로 개명했다”는 기록이다.
동잉음(東仍音).
이것은 이두(吏讀)체 지명이다.
‘이두’란, 우리의 문자인 한글이 생기기 전, 한자의 음독과 훈독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이용하여 우리 옛말을 적은 표기법이다. 이것이 고대의 일본에 건너가 일본식 이두인 ‘만뇨가나(만엽가명:萬葉假名)를 성립시켰다. 이두표기 ‘동잉음(東仍音)’은 ‘새잉음’ 또는 ‘새임’이라 읽힌다. 신라말로 동쪽은 ‘새’, 지금도 동풍은 ‘샛바람’이라고 한다.
한편 신라말로 무쇠는 ‘사’, ‘새’, ‘쉬’였다. ‘새’라 불린 한자 ‘동(東)’으로 무쇠의 ‘새’를 표현한 것이 ‘동잉음’이라는 지명의 내막이다. ‘새잉음’ 또는 ‘새임’이란 ‘무쇠이음’을 가리킨다. 신광은 무쇠가 무더기 무더기 이어진 고장이었음이 이 옛 지명에서 밝혀진다.
고대 제철은 주로 강모래 속에서 채취되는 사철(砂鐵)로 이루어졌다. 신광이 무쇠의 산지였다면, 이 고장의 어디에 사철이 건져진 것일까.
신광의 주산(主山)인 비학산(飛鶴山·762m)에서 흘러내리는 곡강(曲江)이 바로 무쇠의 강으로 지목된다.
신광에서 8대째 살아왔다는 알토박이 엄덕진(嚴德鎭·65)씨를 따라 현장을 답사했다.
비학산은 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모습의 아름다운 산이다. 그 북쪽 날개에 해당되는 산마루가 곡강의 발원지(發源地)다. 이 곡강 상류 유역에 ‘샛골’, ‘불미(풀무의 경상도 사투리)골’등 옛 대장간 터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산골 동네가 지금도 산재해 있다.
이곳 냇가에서도 사철은 건져졌을 것이나, 본격적 건짐터는 지금의 토성리(土城里)에 해당되는 곡강 중류 쯤에 있었을 것이다. 곡강은 이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며 크게 굽어서 칠포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크게 굽어진 강이라 해서 ‘곡강(曲江)’이라 이름 지어진 것일까.
사철은 이같이 강이 크게 굽어진 곳에서 무더기로 캐졌다. 토성리 일대의 강변 모래밭에서 무쇠는 무더기 무더기 채취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쇠이음’이라는 뜻의 지명이 탄생된 것은 아닐까.
강모래에서 사철을 거르기 위해서는 강가에 비스듬하게 긴 도랑을 판다. 도랑 윗쪽에 연못을 마련하고 도랑에 장치한 커다란 나무 홈통에 모래를 부어 연못의 물을 흘린다. 홈통 중간 중간엔 줄구멍이 패여 있어 무거운 사철은 이 구멍을 통해 도랑 받침에 가라앉고, 가벼운 모래는 물과 함께 흘러가게 하는 대형 거름장치다. 일본의 고대 무쇠터에서도 이런 유구와 장치가 잇따라 출토되어 주목을 끈적이 있다.
절거리는 이 무쇠 거름 공사의 기술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절거리’란 이름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절(節)’은 ‘철(鐵)’과 소리가 흡사하다. ‘거리(居利)’는 도랑의 경상도 사투리 ‘걸’, ‘거랑’에서 빚어진 옛날식 발음이다. 이로써 ‘절거리’는 ‘철 걸’ 즉 ‘무쇠 도랑’ 또는 ‘무쇠 거르기’를 뜻한 신라말임을 알 수 있다.
지증왕 등은 절거리에게 사철 건지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8세기의 일본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를 보면 무쇠 캐는 권리를 갖는 자가 그 무쇠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권리까지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철기문화가 우리의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전해진 사실을 감안 할 때 이같은 법제 또한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무쇠 채취 권한은 철기 제조 권한 까지도 갖는 막강한 ‘재산가치’를 의미 했다. 왕들이 능히 관여하여 결정 지을 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한편 그의 아들 이름 ‘사노(斯奴)’는 ‘무쇠 들판’을 가리킨다. ‘노’는 ‘평야’를 뜻한 고구려말이다. 절거리 부자(父子)가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옛 지명과 인명은 고대를 보는 망원경이다. 이 망원경을 소중히 여겨 옛일 속에서 내일을 사는 슬기를 건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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