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아르헨사태 큰 충격

대구 남산동에 가면 천주교 성직자 묘지가 있다.
입구의 기둥에 이런 라틴어 격언이 새겨져 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평생 동안 세상을 위해 헌신한 성직자들이 누워 있는 곳이라, 그 말은 더욱 엄숙하다. 그것도 땅 속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땅위에 서 있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라, 더욱 뼈에 사무친다. 죽음을 넘어서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에도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해를 넘기면서 지구촌에는 두 가지 커다란 변고가 있었다. 기상천외한 테러에 따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이 있었고, 연이은 포플리즘(대중적 인기정치)에 따른 아르헨티나에서의 사태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참한 전후 모습은 지금은 잊혀진 6.25 동란을 떠올리게 했다. 서로 배급 물자를 먼저 받으려는 어지러운 손길은 한국에도 있었던 풍경이다. 그 때는 우리도 그랬지…. 잘못된 지도자들의 선택은 언제나 선택권이 없는 자들의 인간상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누구나 인간의 모든 면모를 벗어버리고 그저 연명하고, 하늘을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전쟁 중도 아니고 극도로 가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인간의 면모를 벗고 있은 풍경은 무엇 때문일까? 자기 돈 내고 떳떳하게 버스 타는 데도 아귀다툼을 해야하고, 모두들 자기 기름으로 자기 자동차를 모는데도 왜 그렇게 새치기를 당해야 하는 걸까?
아르헨티나의 지불불능 상태는 우리의 IMF를 떠올리게 한다. 아르헨티나 사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끄러운 부자들이 정직한 빈자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공기업을 민영화하기는 했는데, 그것이 외국인 자본에 의한 민영화, 즉 외채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이란 정치적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인데도, 당적이 다른 사람들이 부패당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패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현상들도 생소한 일들이 아니다. 우리도 요즘 부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텔레비전에서 이웃에서 그것도 부끄러운 부자들을 만나곤 한다. 또한 다양한 공기업들이 민영화 되고, 외국 기업에 접수되는 소식을 듣기도 하고 속속 절차를 밟는 것을 보기도 한다. 나아가 뜻은 별로 바뀐 것이 없는데도, 오늘은 이 당에서 내일은 저 당으로 옮기는 정치인을 보기도 하며, 정치적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는 풍경을 접하곤 한다.
우리는 이제 전쟁을 치르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전쟁하는 기분으로 사는 것일까?
아직도 위기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던 비인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IMF를 공식적으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엄격히 말하면 휴전 중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면, 먼저 마음의 여유와 평화시의 인격을 추슬러야 할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국가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면, 부자들이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정직한 빈자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당이 뜻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라면 하나의 기치 아래 여러 당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아프가니스탄이나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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