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숨쉬는 계산성당 일대

1943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그토록 그리던 민족 광복을 눈앞에 두고 일제 탄압과 병마의 고통 속에서 이승을 하직한 시인 이상화가 마지막 살았던 고택(계산동 2가 84번지)이 일제 때 그어 놓았던 도시 계획선에 의해 소방도로가 나면 철거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한국 근대 문화의 숨결이 아직 맥동하는 현 계산성당과 그 옆 주차공간 뒤편에는 반월형의 옛날 고옥들이 세월의 흐름에 지쳐 삭아 허물어져 가는 모습으로, 그러나 아직은 한 때의 영광의 자태와 흔적이 남아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의 발원지인 대구 계산성당은 아직 고풍스런 위엄과 자태를 지키며 서 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모자이크 채색 성화의 유리창 너머 자지러질 듯 지저귀는 참새소리가 해묵은 느릅나무 가지사이로 환하게 흩어지는 계산성당 경내와 바로 인접해 있는 84번지는 상화가 1938년부터 43년까지 살다간 공간이다. 현재 그 집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 병원이 서 있는 곳은 한솔 이효상 시인이 젊은 시절 한때 살았던 고택 자리이며, 다시 한집 건너 아직은 세월의 영광의 흔적이 묻은 적벽돌 돌담위로 담쟁이 넝쿨이 뒤덮고 있는 한옥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집이며, 다시 두 집쯤 건너 상화의 백형이자 독립운동을 하였던 이상정 장군이 살다가 이승을 하직한 유서 깊은 공간이 있다.
그 뿐 아니다. 이 계산동 매일신문 뒤편 골목을 뽕나무길이라고 하는데 이 골목은 화가 이중섭, 구상, 오상순, 이장희, 백기만 시인 등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인들의대구 생활의 화려한 취기의 일상 일화가 어려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길 건너 남산병원 자리는 화가 이인성이 살다간 터이기도 하다.
얼마 전 상화 고택을 찾았다. 이 공간은 일제의 탄압이 어느때보다 고조되었던 40년대 이상화가 가난과 병마, 그리고 일제 탄압의 굴레속에 고뇌하며 이승을 하직한 현장이다. 당시 교남학교 교가 가사의 불온성 문제를 빌미로 하여 일본 순사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이 때 고월 이장희와 함께 교남회관에서 개최하려고 준비한 시화전 시 초고를 몽땅 압수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압박속에서 백기만, 이장희 등 문우들과 밤 늦도록 조국 광복과 문학에 대한 담론을 이어갔던 사랑채는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고 시멘트 벽면은 푸석푸석 삭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우리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영국 다이애나비의 장례가 치러지고 또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기도 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이승의 고뇌와 저승의 영광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영국인들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초기 고딕건축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사원의 뽀족한 첨탑 아래 경내에는 실락원을 지은 밀턴, 셰익스피어, 워즈워드와 같은 세계적인 시인의 기념비와 함께 존 맥크레이의 ‘폴란더스의 전선’이라는 시비가 지키고 있는 1, 2 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함께 있다. 이승의 고뇌와 저승의 영광이 함께 하는 위대한 영국 사람들의 문화 공간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대구, 영국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버금가는 문화 공간이 바로 우리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무관심과 열등심, 그리고 천박한 자본의 힘에 휘둘려 모래톱처럼 문화공간이 잠식당하고 있다. 지워서는 안될 지난날의 문화의 자취와 현장이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떠밀려 가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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