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왕비 첫머리에는 시조 추모(鄒牟)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배경이 적혀 있다.
비문은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시니 북부여 출신이시고, 천제(天帝)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고 선언한 뒤 이런 추모가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전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 부여왕실에서 축출된 추모가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 어디인지 논란이 분분하나 비문이나 「삼국사기」 같은 문헌기록을 종합할 때 산 위였음은 확실하고, 때가 기원전 37년이었다.
건국 40년만인 2대 유리왕 재위 22년(AD 3)에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까닭이 초기 도읍지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에서 말미암았다.
국내성 시대는 장수왕 15년(427) 평양 천도 때까지 지속된다.
고구려 700년사 중 초기 약 400년간 내성은 고구려의 중핵이었음은 틀림없다. 국내성은 그 위치가 중국 즙안(楫安)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을 비롯해 이곳이 왕도였음을 입증하는 유적이 밀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국내성이 2003년이면 꼭 천도 20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기념한 각종 행사가 한국과 중국에서 준비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즙안현당국이 학술행사 등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구체 내용은 아직까지 파악되지는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가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서 회장은 “고분벽화 학술대회라든가, 현장탐방 행사, 전시회 등 10가지행사를 추진중이다”면서 “다른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 학자들이 공동참여하는 국중(國中)학술대회는 반드시 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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