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는 4번째 대선이 끝났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세대로 한 단계 진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긴급한 해결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87년 6월 항쟁 이후 네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사회는 정치의 영역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바라는 것을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던 어느 외국인의 혹평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이번 선거를 통해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확실히 국민주권시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 경제안정, 실업문제와 빈부격차 해소, 교육문제, 국민통합, 권위주의 청산….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수행해야 할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 계기에 정치개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국민들은 선거에서 후보자 선정 과정이나 정책 수립과정에는 소외되어 있었고,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기껏 각 정당의 보스들이 지명하는 후보자들 사이에서의 선택에 그쳤거나, 각 정당이 내어 놓은 공약패키지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을 따름이지요. 그래서 그 동안 선거에 승리한 정당의 공약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국민의 의사에 의한 선택이었는지가 분명치 않았습니다. DJP연합이 내걸었던 내각제개헌이 그 한 예가 되겠지요. 그래서 그것이 흐지부지되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제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후보자 선정 과정이나 공약의 수립과정에 일반 국민이 자기 의사를 표시하고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열렸습니다. 또한 이번 선거과정에서 ‘개혁국민정당’이나 ‘노사모’, ‘창사랑’ … 등에서 보듯이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당비를 내는 진짜 당원이 없는 정당에서는 모든 것이 위로부터 결정되었고 따라서 일반 국민들과 일정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일반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립하고 그러한 세력이 권력을 잡는 관례를 확실히 정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 개혁을 완성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구요.
▲자본주의적 단일 세계 체계가 전개되면서 가볍고 경박스러운 대중문화의 전면화와 이윤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인문학의 위기니, 내면성의 위기니 하는 말은 이미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같은 시대변화에 대한 대안적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자본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건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도 요즈음 정통 인문학 강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취업관련 강의나 토플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강좌나 수영, 레크리에이션 같은 가벼운 강좌에만 몰리고, 인문학 관련 강좌는 종종 폐강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의 위기요, 반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차 문화가 깊이를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에 이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인문학 육성책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우리 내부에 있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구를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욕구이기도 하고, 물질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또 어느 철학자가 ‘자발적인 가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얘기했듯이, 지금의 지나친 성장 일변도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연 전체의 생명적 순환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과 절제의 소중함을 배워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인간다운 삶에 대한 반성에 의해 그것을 통제하고 인간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건전성을 훼손하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가기 쉽습니다.
▲좀더 현실적 문제로는 우리나라는 혹독하고 냉엄한 서구 시장경제 적응 과정을 겪으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와 농촌과 도시의 문화격차 심화 등 문제점도 심각한 실정입니다.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이 있다면….
-흔히 이야기하듯 지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드높습니다. 기존의 국가간 장벽이 낮아지고 정보와 인적, 물적 자원이 국가간의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고 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일면 합리적인 면을 갖습니다. 시장과 자유경쟁을 통해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기업과 산업, 조직만 살아남게 함으로써 세계적 수준에 걸쳐 여러 조직에 대한 합리화와 효율화를 강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효율성과 합리화의 요구는 끊임없이 인간을 닦달하고 몰아 세웁니다. 경쟁은 각 조직을 합리화하고 인간의 능력을 끊임없이 계발하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연대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을 갖습니다. 삶을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죠.
경쟁은 한편 필요한 것이지만, 공동체에 대한 강조와 사회적 연대감의 고취를 통해 경쟁과 시장 논리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지 않으면, 오히려 피말리는 경쟁은 우리의 능률도 저하시키게 될 것입니다.
또한 농촌은 우리의 삶의 뿌리입니다. 얼핏 시장 논리에 의해서는 계산되지 않는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농촌은 보존하고 있고, 또 생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각성일 것입니다.
▲대선 과정에서 논의된 일입니다만 교육의 지역적 불균형 해소와 지방에서의 우수 인적 자원 확보 등 교육문제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불균형 문제도 심각한 지경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역 문제라고 하면 우리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동서간의 지역 감정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막상 우리가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역문제는 서울과 지방간의 지역 문제입니다. 서울과 지방간의 지역적 불균형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우리가 이 문제에 심각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 서울과 지방간의 불균형이 날로 심화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력과 그에 따른 취업기회에 있어서도, 교육에 있어서도, 정보와 문화에 있어서도….
최근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역간 경제력의 불균등정도를 나타내주는 지니계수가, 94년에는 0.083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0.123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 확대의 근본요인은 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보와 인재의 수도권 집중에 있습니다.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 격차가 확대되는 배경에는 ‘권력과 경제력의 수도권 집중 → 정보와 취업기회의 수도권 집중 → 인재의 수도권 집중 → 권력과 경제력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누적적 악순환구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우수인력의 존재가 산업입지의 핵심요인이 되므로, 이러한 악순환구조로 인한 지역격차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입니다.
▲그 외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국민화합 방안 등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종전의 지역적 대립 구도 외에 계층적 대립, 세대간의 대립 구도가 중층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저는 대립과 갈등이 무조건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어느 정도의 대립과 갈등이 과정상으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화해와 통합을 겨냥한 과정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대립과 갈등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 저는 이것이 우선 국민화합의 첫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서로간의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 이것이 화합의 첫출발이자 토대가 되겠지요.




김영기(金永基)교수-경북대 윤리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기술시대의 생명윤리’, ‘자연주의적 오류에 관한 논의’, ‘매킨타이어의 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비판’ 등 윤리, 철학 분야의 탁월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저서로는 ‘20세기 영국철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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