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비 내린다. 아침이 오긴 해도 해는 볼 수 없으리라.
날씨탓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만든 벽 앞에서 비상구를 찾지 못하는 이 시대, 진정 빛이되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빗방울은 창문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다. 쓰러지는 순간 빗방울은 가위표가 된다. 나는 비를 바라보며 정답이 보이지 않는 시험지 앞에 절망하는 수험생처럼 불안해 진다. 그리고 우산을 찾는다. 우산을 찾는 동안에도 이미 나는 비에 젖고 있다. 겨울 날 외투없이 바람 속을 걸어가야 할 것 같은 막막함에.... 할 수만 있다면 커다란 우산이어야 한다. 비바람에도 끄덕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우신은 작고 보잘 것 없다.
우리는 저마다 우산을 머리에 이고 길을 간다. 우리가 들고 가는 우산은 모양도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자신이 의지하는 삶의 피신처가 그렇듯이.
우산으로 채워진 우리의 길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아우성만 가득하다. 인류 최초의 절망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 속에 있다. 태초의 인간 요람이었던 에덴 동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면서부터 지상에는 비가 내렸으리라.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그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를일이다. 노아의 홍수는 인류의 타락 앞에 신이 흘린 절망의 눈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 때문에 신은 무지개라는 구원의 우산을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의 가슴 속에 내리고 있는 한 줌의 덩어리 속에도 희망의 씨앗은 숨겨져 있으리라.
우리의 길 위에는 일기예보와 상관없이 비가 내릴 때가 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만난다. 땅에 붙박이로 선 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분신을.
그러나 나무는 비를 맞으면서도 가지만큼은 하늘을 향해 뻗고 있다. 나무의 몸짓에서 나는 지상에 존재하는 삶의 진정한 꿈을 본다. 나무가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의 삶이 이처럼 힘들고 아픈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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