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영 선 <경주초등학교 교사>

수많은 꽃들이 배턴을 주고받듯이 피고진다. 피는 중에도 지는 꽃이 있고, 지는 중에도 피는 꽃이 있다. 우리네 사는 모습처럼 기쁨과 슬픔이 교직한다. 한 그루 꽃나무 안에도 나고 지는 꽃이 공존하여 바라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꽃 중에도 선택 사양을 하듯이 안갖춘꽃이 있고, 부족함이 없을 듯 다 갖춘꽃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곡식 종류가 대개 안갖춘꽃에서 얻어진 열매라는 사실이다. 다 갖춘꽃에서 얻은 열매는 대부분 후식으로 쓰이는 과일이거나 먹어도 안 먹어도 될 그런 열매들이 많다.

벼와 보리, 수수와 옥수수, 조, 둥굴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모두 안갖춘꽃이 남긴 결실이다. 우리의 주식으로 쓰이는 벼는 꽃잎이 없다. 모내기 끝난 들판이 초록 물결을 이루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암술도 수술도 초록빛이라 꽃인 줄도 모르고 지나친다. 제 본분을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런데 꽃이라고 요란을 떤 꽃들은 그 열매가 부실한 경우가 허다하다. 복사꽃처럼 꽃도 예쁘고 열매도 먹음직스런 것도 있지만 꽃만 요란하게 피웠다가 지는 실속 없는 꽃들도 있다. 장미나 개나리는 꽃이 화려한 대신 씨앗도 제대로 남기지 않아, 그 가지를 꺾꽂이하여야 한다.

수많은 꽃들이 있지만 다들 생긴 모습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뿌리나 열매가 약용으로 긴히 쓰이는 꽃도 있고, 빛깔이나 태가 고와 관상용으로 사랑을 받는 꽃도 있다. 집안에서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꽃도 있고, 들이나 산에서 야생으로 비바람을 견디며 청초하게 피었다 지는 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꽃도 아니면서 그 향기로 사랑을 받는 허브 종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전자파를 방지한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이국에서 수입된 산세베리아 같은 선인장류도 있다. 기후가 맞지 않아도 용케 잘 견디며 안방까지 들어와 공기청정역할을 하며 함께 기거한다.

허브는 참 신기한 것이 바람이 살랑 불어도 그걸 못 참고 향기로 응답한다는 것이다. 잎이 무성해지면 한 두 잎씩 허브차로 내가도 잘 견뎌준다. 참꽃 종류가 눈으로 먹고 입으로 먹는 꽃이라면, 허브류는 코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는 셈이다.

꽃이 아니라도 꽃처럼 사랑을 받는 것도 있고, 모양은 예뻐도 그 향기가 고약하여 꽃이면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꽃도 있다. 풀도 꽃을 피우고, 나무도 꽃을 피우며 다들 이 세상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 한다. 때를 놓쳐버리면 후다닥 꽃을 피우기가 무섭게 열매를 맺으려 한다. 절기를 알아채는 것이 사람보다 더 민감하다.

그러고 보니 사람도 꽃으로 불리어지고 꽃으로 다가서는 때가 있다. 돌아보면 나 또한 어느 한 철은 꽃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꽃보다는 한 그루 나무이기를 원한다. 둥근 나무 의자가 될 때까지 새들이 둥지 틀 수 있도록 가지를 내밀어 주고 싶다. 가지 끝에 스치는 바람결이 파문을 이룰 때마다 안으로 조용히 나이테를 감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 꽃이고 싶을 때에는 물푸레나무나 다래나무처럼 어느 산기슭에서 산 아랫마을로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꽃을 피우고 싶다. 길이 보일 듯 말 듯 지워진 오솔길을 걷다가 떨어진 꽃송이를 발견하곤, 즈려 밟기가 어려워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 있다면, 기꺼이 나 여기 있다고 꽃 한 송이 툭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조릿대 나무를 알고, 생강나무를 알고, 물푸레나무에 물오르는 소리에 귀 기울여줄 줄 아는 다감한 이 있다면, 마음 한 귀퉁이 내어준들 허물 될 거 무어 있으리.

살구나무가 예쁜 꽃을 떨어뜨린 뒤에 풋 열매를 남겨놓았다. 열매만 보아서는 매실인지 복숭안지 살군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수많은 꽃들이 진 자리에 앉은 열매들이 신 살구가 될 줄을 어미인 나무는 알고 있었을까?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들이 때론 입 안에 슬픔을 괴게 하여도 크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은 있다. 슬픔도 때가 되면 절이 삭고 단맛이 스며든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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