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시절 작은 안내책자를 통해서였다. 집안의 누군가가 경주 관광을 다녀오면서 구해다가 내 책상 위에 얹어 둔 것이었다.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사랑에 가슴 태우는 지귀가, 삼화령을 넘나드는 충담이, 반수반인의 강수가, 아버지를 만나러 분황사로 종종걸음치는 설총이, 머리에 깃털을 꽂은 신라 사람들이, 가녀린 숯불 연기가 피는 기와집에서 설화와 함께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를 들볶은 후에야 경주길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양은 도시락을 옆에 끼고 섬안들의 긴 논둑길을 지나 효자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닿았다.

설화와 역사가 숨쉬는 경주
현재 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경주 박물관은 초등학생이 걸어가기에도 만만한 거리였다. 1,200여 평의 터에 온고각, 집고관, 종각 등 몇 채의 기와 건물로 이루어진 옛 박물관은 포근하였으며 들뜬 마음을 다독여 주기에 충분했다.
하루종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알고 있던 설화와 역사들이 그곳에서 펄펄 뛰는 심장을 가진 채 살아있었다. 낡은 기와집 추녀 밑에서 혼자 먹는 도시락도 신라의 그 맛이었다.
그 후에도 혼자 찾아가는 서라벌 길은 계속되었다. 시가지마다 역사적 삶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천년의 시간이 흘러서 그 날까지 이어지는 따뜻한 역사의 흔적은 사람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경관이 사적의 눈높이에 꼭 맞는 경주가 있었고, 삶의 터전에 대한 신라인들의 애정이 도도히 살아 있었다. 경주에서는 신라 얘기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박물관 뜰에만 서면 나는 설화 속의 작은 장치가 되곤 했다.
나는 요즈막에 40년 전의 그 소년이 되어 서라벌로 간다. 변화와 정체의 뒤엉킴 속을 헤치며 매일 경주로 간다. 신라 토성터가 남은 북형산을 지나 왕위까지 바꿨다는 알천거랑을 건너 서라벌을 찾아간다.

역사와 유리된 행사 아쉬워
경주시내의 벚꽃은 벌써 지고 있는데 보문의 벚꽃은 이제 막 시작이다. 한치 앞에서 일어날 시절도 바르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벚꽃 개화시기에 맞추어 벌이려고 잡았던 많은 행사가 틀어지고 말았다.
구간 마라톤 대회, 술과 떡 잔치, 벚꽃 마라톤 대회도 벚꽃과는 상관없이 치렀다. 그러나 떡과 술에 대한 유례나 역사성 등이 도외시된 면은 있으나 50만이 넘는 관람객이 모였으며, 11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등, 떡과 술잔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일에는 안민가를 노래한 충담 스님을 기리는 충담제도 있었다. 그러나 작금에 이뤄진 행사와 그 뒷 이야기에는 시내 상권과의 연계 미흡으로 인한 경주시민들의 소외감이 묻어있다.
이에 따라 경주시청 이주와 나들목 만남의 광장 건설을 보는 시내 상가의 시선도 곱지 않다.
아울러 이러한 작업들이 자꾸만 역사와 유리되는 것만 같아서 안타깝다. 신라혼이 숨쉬는 서라벌이 아닌 벚꽃이 만발한 도회지로만 치닫는 것 같아서 조바심이 일어난다.
천군동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절터 낡은 석탑 앞에서 40년 전 소년이 되어 서라벌을 본다. 자꾸만 뒷방 노인네처럼 괄시덩이가 되어 가는 그 모습이 서럽게 다가온다.
액자가 되어버린 사적들이 시민의 삶과 거리 곳곳에서 살아났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다시 설화, 그 이야기 속의 작은 장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 일 광 - 포항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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