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들을 시험들게 했던 이라크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의 목소리는 파병의 명분과 실리를 놓고 여전히 난분분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이나 파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국가라는 존재의 생존방식을 이해하는 차이를 빼면 모두 옳다.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을 터인데 그때마다 남의 일로 우리 국론이 쪼개져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들이 국가의 생존방식은 어떠해야 되고 생존에 있어서의 명분과 실리는 어떤 관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번 전쟁이 명분없는 전쟁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대놓고 반대하자니 미국의 보복이 두렵고, 그렇다고 동조하자니 세계여론이 부담스러웠던 게 약소국들의 딱한 신세다. 특히 우리같이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우의를 다져온 나라들일수록 갈등과 고민의 정도는 더했을 것이다. 우방이라는 명분과 반전의 명분이 충돌하다보니 그것들을 따랐을 때의 국익을 놓고 ‘복잡한 계산’이 머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하겠다.‘악의 축’ 북한이라는 혹을 달고 있는 우리의 경우는 행보의 방향설정이 더더욱 어려운‘선택의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國益이 더 큰가를 판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파병으로 결론을 낸 것은 다행스럽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명분이란 사람이 지켜야할 마땅한 도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명분이란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한 목숨을 얼마든지 건질 수 있었는데도 철창 속에서 독배를 받아든 소크라테스, 그가 지킨 명분은 자신의 길을 끝까지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명예, 자신의 철학을 살리자는 계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시이저의 가슴팍에 비수를 꽂아 넣은 로마의 공화주의자 브루터스, 그의 비수 끝에 실린 것은 순수한 공화주의자로서의 명분 뿐이었을까.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키려는 순교자의 명분은 천국에서의 더 큰 실리를 향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명분과 실리를 굳이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인류가 지켜야할 절대적인 도덕적 명분임에 틀림없지만 만약 소중한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아비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있을까. 자식의 생존보다 더 큰 명분과 실리가 있을까. 국가·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아이의 굶주림의 한 원인이요, 아비의 도적질에 중대한 동기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아비에게만 도덕적 명분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국제관계도 이치는 똑같다. 북한문제는 현재도 움직이고 있는‘발 밑의 화산’이고, 미국의 의지 여하에 따라 이 땅도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처럼 절박한‘생존’이라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명분과 실리는 없다. 결코 미국을 좋아해서도 이라크를 미워해서도 아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파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부인해도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곧 명분의 잣대이고 그 순리를 좇는 것이 곧 실리다. 전리품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미의 기치’를 꺾어버리고 있는 독일, 프랑스 등의 행동에서도 국가간의 명분이란 결국 실리와 한 몸임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감상주의만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국제정치현실이다.
우리 같은 약소국이 어떤 명분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그에 따른 실리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가시적인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미래전망과 행동방법이 국익에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시점에서 ‘선택의 잣대’는 전후 세계의 역학관계변화인데 현재로선 어떠한 반미전선도 미국과의 대등한 대립각을 세우기에는 당분간 역부족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지금 내릴 수 있는 답은 분명하다. 파병을 결정하고 나니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가. 잇따르고 있는 부시정부의 긍정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금방 따내고 있는 실리들이 아닌가.

정 준 기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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