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부르는 노래에, 음식을 많이 먹어 배탈이 났는데 천사같은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가사가 있었다. 율동을 섞어서 신나게 부르는 아이의 노래를 계속 듣다가 이어지는 노랫말에 그만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다음 절은 호박같은 간호사가 등장하고 기분이 나빴다로 맺고 있었다. 서너 소절 남짓의 아이들 노래가 치료의 전 과정을 낱낱이 묘사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서 나았는지 수술까지 했어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르긴 해도 아이의 머리 속에는 배탈을 낫게 해준 고마운 손길보다 예쁘고 잘생긴 외모의 중요성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반복해서 새겨질 것이다.
몇 년 전, 신문만화가 이렇게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어떤 만화에서도 외모를 주제로 삼은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길을 가다 넘어졌다. 곱상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일으켜주니까 아주 좋아했는데, 못생긴 여자가 일으켜주니까 오히려 화를 낸다는 것이었다. 선행도 인정받으려면 외모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보통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단정함보다 지저분함을 선호할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부모에게 물려받는 신체를 머리카락 하나 손상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덕이자 도리였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외모 강박증이 도를 넘고 있다는 것이다.
TV와 신문잡지에는 나이를 거슬러 젊음을 유지하라는 화장품 광고가 넘쳐나고, 인터넷에는 온갖 종류의 다이어트 광고가 번쩍이며 눈길을 끌고, 거리에 나서면 1~2주만에 책임지고 몸무게를 몇 Kg 빼고 몸매를 잡아준다는 현수막이 길모퉁이마다 펄럭인다.
성형외과는 나날이 늘어나고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10대가 전체 성형시술의 10%를 차지한다고 한다. 얼굴의 일부를 고치러 가면 균형있는 외모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 손대는 소위 토탈성형을 권유받기도 하고, 젊은 층 사이에는 성형수술 비용을 예상하는 견적 운운하는 것이 일상적인 농담으로 오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 어떤 이는 취업을 위해 그야말로 뼈를 깎고 살을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한다. 성형수술의 부작용으로 자살하는 여성도 있다. 이쯤 되면 외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가히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10일 발표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초중고생은 2명 중 1명 꼴로 자신의 키와 몸무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키와 몸무게가 정상인 학생도 4-7%가 신장과 체중조절을 위해 특수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키와 몸무게에 대한 불만족은 남자보다 여자가 크고,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갈수록 심하다고 한다. 여학생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성인 신장은 한국인 20세의 평균치보다 키는 9.2cm나 더 크고 몸무게는 4.8Kg나 적다고 한다. 이것은 웬만큼 늘리고 빼도 도달하기 힘든 기준일뿐더러, 이대로 한다면 도리어 기형적인 몸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에나 예쁘면 곧 착하고, 못생기면 성격도 나쁘다는 백설공주와 계모, 콩쥐와 팥쥐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치료는 축적된 전문지식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지 얼굴로 하는 것이 아니며, 생산적인 직원은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유능한 사람이지 사무실의 꽃으로 장식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위 연구의 책임자는 청소년이 자기 신체에 대해 바른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교육의 대상은 청소년이 아니라 전 국민이다. 매일같이 TV나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온갖 범죄로도 모자라 못생긴 얼굴을 고치지 않는 것도 죄악으로 삼게 된 사회에 살지 않으려면, 사람의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나온다는 고금의 진리를 새겨볼 일이다.
강세영(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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