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을 바라보던 퇴계가 약관 스물 셋의 율곡을 만났다. 율곡이 혼례를 치르고 처가인 성주에 머물다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퇴계를 찾아 이틀 밤을 묵었다.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었고 조선을 풍미했던 거인들의 만남이었으니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오고 갔을 터이다.
후일 율곡의 재능에 감탄하여 퇴계는 문인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연 후생이 두렵다’란 말을 남기고 있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를 범주개념으로 설정하여 우주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와 기에는 두 가지 상호원칙이 있으니 불상리(不相離)와 불상잡(不相雜)이다. 전자는 기(氣)없는 이나, 이(理)없는 기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고 후자는 그러면서도 이는 이고, 기는 기라는 주장이다.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학설도 갈라진다.
퇴계는 불상잡의 원칙을 중시해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기대승이 불상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으로 14년간의 긴 논쟁을 한다.
조선 성리학의 백미로 일컫는 이른바 ‘퇴고사칠논쟁’이다. 서신왕래를 통한 치열한 공방 끝에 퇴계도 자기학설을 바꾸어 ‘인의예지인 사단(四端)은 이가 발한다는 것’을 ‘이가 발해서 기가 따라가는 것’이라 고쳤고, 희노애락 등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는 것’을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을 타는 것’으로 정정했다.
이에 반해 율곡은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는 까닭은 이(理)이니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이 말은 고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퇴계 학설중 사단은 이가 발한다는 주장을 율곡은 전면 부정했다. 다만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을 탄다’는 학설만 인정하여 ‘기일도설(氣一途說)’을 주장했다. 결국 율곡은 퇴계 학설의 선별적 반 정립의 입장이다.
그들은 우주의 근본이치를 논증한 원칙주의자들이다. 심오한 학문에 걸맞게 지행합일의 인생을 산 선비들이었다.
무릇 학문과 인격과 경륜을 고루 갖추어야 비로소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을 닦아서 도야된 인격이라야 높고 밝으며 학문을 뒷받침한 경륜이라야 크게 빛났다. 인격만 갖추고 학문과 경륜이 없으면 고루하고 학문은 있으나 인격과 경륜이 없으면 약하고 경륜은 있으나 인격과 학문이 없으면 황태(荒怠)한 법이다.
선비는 인생의 꽃이었고 ‘선비가 없으면 천하의 도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예기 유행’편에는 선비의 몸가짐이 기록되어 있다. 선비는 물욕을 버리고 쾌락에 빠지지 않으며 죽음을 눈앞에 두어도 그 지조를 바꾸지 아니하고 잔꾀를 부리지 않는다. 죽일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을 뺏을 수는 없다.
이런 선비들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왕이 정사를 그르칠 때 목숨걸고 반대했던 사람도 선비였고, 대역죄의 누명을 쓰고 사약을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사필귀정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이다. 퇴계와 율곡도 대쪽같은 성품에 돈이나 벼슬에 욕심이 없었다. 성학십도를 그렸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여당대표가 뇌물죄로 영장이 청구되고 돼지저금통으로 모았다는 대선 자금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온통 더러운 돈 얘기들이다.
한비자가 ‘백성은 이득 있는 곳에 모이고 선비는 명분 있는 곳에서 죽는다’고 했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리 정치판에는 이런 ‘선비’가 자취도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제갈 태 일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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