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삶은 깨끗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 편안해야 합니다. 또 즐거움이 있어야합니다.
즐거움, 편안함, 고요함, 넉넉함, 청정함 등의 세계를 가질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불 수 있는 내면이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나 소신. 신념. 지식. 사고. 경험. 교육이 개입되지 않은 마음의 세계를 봐야합니다.
사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는 만들어진 눈으로 봅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습니다. 만물의 참모습(實相)을 ‘안다’는 것은 일상적 용어로서의 ‘안다’는 것과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안다’고 말할 때, 여기에서는 아는 것(주체)과 알려지는 것(객체)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안다’는 행위, 즉 지성의 작용은 주·객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또 그래야만 그로부터 객관성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안’ 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대상을 어디서 보느냐 하는 시점(관점)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방법의 차이에 의해서 알게된 결과는 마땅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장미는 붉다’고 하는 것은 색채라는 관점에서 본 장미의 진실이며, ‘장미’과 에 속한다’는 명제는 분류학상으로 본 장미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다 장미가 갖고 있는 일면적인 진실만을 나타낼 뿐, 장미 그 자체를 알아맞춘 것은 아니며 다만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 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입니다.
원시 경전 중에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눈먼 장님에게 코끼리를 만지게 했더니 코, 다리, 몸통, 꼬리 등을 제각기 만져 보고 코끼리의 모습을 각기 달리 말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지성적 작용의 한계를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알고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 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즉‘그림의 떡’이므로 이는 떡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그 개념을 전할 수 있지만, 먹을 수 있는 떡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모름지기 ‘자기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자기 속에서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면 대답은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자기와 알려지는 자기 즉, 주·객이 일치한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감득할 수 있습니다. 선이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선이란, 바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체험입니다
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性佛)로 종지(宗旨)를 나타냅니다. 수선(修禪)의 목적은 식망(息妄)과 현성(顯性)입니다. 이때 현성은 그 어떠한 주체도 세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견성으로 유무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것이 성불입니다.
견성, 그 어떤 주체를 세우지 않습니다. 이것을 심(心), 도(道), 성품, 본래면목,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자성(自性)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럼으로 선은 어떤 격식이나 논리를 떠나 한결같은 마음, 즉 修心, 用心, 現心이라고 말합니다,
선은 바로 수심법(修心法)입니다. 수심은 먼저 무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무심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참선입니다
무심이란 마음 속이 답답하고 허전하고 쓸쓸한 생각·근심·불안·초조·망념등 일체의 念이 없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보기입니다.
예로 빈 병이라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안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 선이란 자기의 이해이고 우주의 이해입니다.
존재의 인식·사고·사념이 사라질때 자연의 마음(自然心),그대로의 마음(平常心), 깨끗한 마음(淸淨心)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옛 시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心不忘取過去法 과거에서 헤매지 말고
亦不貪着未來事 미래에도 허덕이지 말고
不於現在有所住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了達三世悉空寂 과거, 현재, 미래가
편안하리라.
해월 스님 <동화사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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