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로 삶의 언저리들마다 저마다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보다 자살로 인한 사망률이 더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직장을 잃어버린 가장들, 부부간의 문제로 야기된 파탄 난 가정의 가족들... 어디 이뿐이겠는가? 수능시험의 실패자들, 취업 전선에서의 낙오자들, 기업의 도산자들....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바보 같이 죽기는 왜 죽어...’ 라면서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해 버린 주검들의 영전에 서서 중얼거려보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없다.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가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죽어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고, 인내의 한계가 보인다면 그래도 견디고 버틸 수 있겠건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려고 힘든 고난의 밤이 찾아오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고난의 밤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움의 깊이가 깊을수록 사람들은 의기소침해 지면서 자신의 열등감 속으로 파고 들어가 숨으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힘든 과거만 보일 뿐, 살아갈 미래에 대한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다. 즉 내일이 없다. 있다할지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내일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작 선택해야 할 길이 실망과 좌절과 절망의 길 뿐일까?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오클라호마를 떠나 캘리포니아로의 대이동을 감행하는 소작농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소설은 미국 농민을 상징하는 조우드(Joads)일가의 긴 노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들 가족은 다른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대공황에 따른 피폐한 생활은 물론 더스트 보올(Dust Bow)l이라는 모래바람까지 감내해야 했다. 대공황 기간 동안 근 10년이나 계속된 이 혹독한 바람은 농지의 표토(表土)를 전부 쓸어갔다.
토양침식으로 작황이 나빠지면서 농민들의 생계까지 막막해졌다.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농사를 더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속수무책의 상황을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클라호마의 거친 땅이 하루아침에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언젠가’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오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으면서 희망을 쌓아간다.
삶이란 별 것 없다. 돌아보면 나 혼자만이 당하는 어려움이라는 것도 없다. 이미 나와 같은 상황을 거쳐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또 누군가가 오늘의 내가 당면한 고난의 밤 속에 직면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세상에는 전무후무하게도 내 자신에게만 고난의 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생이란 별 수 없이 고난의 밤을 통과해야만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자연이 그렇다.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와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지난 간 자리에 자연은 다듬어지고, 만들어지고, 변형되어가면서 인간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캔 가이어는 “사람은 자연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아름다워져 가는 존재라” 고 했다. 그는 “날씨는 지각변동으로 생긴 들쭉날쭉한 비탈들을 천천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드럽고 완만하게 만들어 준다.
한때 멸망의 과정처럼 보였던 것이 창조의 과정이었음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부수는 듯한 이런 경험들로부터 우아한 생명과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는 80년 정도이다. 굽이굽이 돌아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굽이치는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고난의 깊은 밤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일 뿐이다. 희망의 찬란한 아침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날 아침에 정녕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의 아침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견디며 신중하고 침착한 삶의 자세가 필요할 때이다. 정녕 삶의 아름다움은 고난 뒤에 오는 것이리니...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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