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人材를 잘 알아내어서 제대로 쓰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1천 수백년전 신라 중기의 인재선발법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고, 지금도 참고할 여지가 많다. 6세기 중엽 신라 24대 진흥왕때의 일이다. “훌륭한 인물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왕과 조정 중신들이 이 일을 놓고 곰곰히 궁리하다가, 내린 결론이 “源花제도를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民家의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 源花로 삼고, 그밑에 청소년들을 모아 낭도로 삼고, 그들이 어울려 함께 행동하게 한 후에 그 행동거지를 보고 평가한 후 적절한 자를 천거해 관리로 임용하는 제도를 진흥왕이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남모’와 ‘준정(삼국유사에는‘교정’) 두 미인을 源花로 삼아 두 조직이 형성됐고, ‘낭도’ 3,4백명이 모여들어 청소년조직이 이뤄졌다. 그런데 두 처녀가 서로 미모를 겨루며 시기 질투하게 됐는데, 준정이 남모에게 술을 먹여 경주 북천에 데려가 죽여버렸고, 이를 아는 어떤 사람이 이 사건을 암시하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고, 결국 그 살인사건이 들통나 준정은 사형당하고 원화제도는 폐지됐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신라사회는 분명 신분사회였다. 성골, 진골, 6두품에서 1두품까지 계층이 분명했다. 그런데 民家의 처녀를 뽑아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것은 ‘신분과 성별에 상관 없이’ 광범하게 인재를 찾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女性을 대장으로 삼고 소년들이 그녀를 따르도록했다는 사실은 ‘여성의 능력’을 준중했음을 말해준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무려 3명의 여왕이 신라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신라사회가 ‘性차별 없고, 班常의 차별 없는’ 평등사회였음을 증명한다.
원화제도가 폐지된후 몇년이 지난후 진흥왕은 아무래도 청소년을 교육해서 선발할 제도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화랑도’를 창설하게된다. 이번에는 良家의 미소년을 뽑아 國仙으로 삼는다. 삼국사기는 화랑도에 대해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며, 山水를 찾아 유람하며, 그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썼다. 고운 최치원선생은 화랑도의 교육내용이 儒佛仙 3교였다고 했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국가에 충성함은 孔子의 뜻이요,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不言의 가르침을 실천함은 老子의 뜻이요, 살생을 가리고 선을 실천함은 석가의 가르침이다” 했다.
이와같은 화랑도가 그후 꾸준히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제대로된 인재들을 양성하고 선발했는데,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고 썼다. 충담사, 월명사 같은 고승대덕도 화랑출신이고, 김춘추, 김유신은 물론, 문무를 겸전했고 통일후 당나라와 맞붙어 싸워 이긴 문무대왕도 화랑출신이다. 3국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화랑제도라는 탁월한 인재양성 선발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2천수백년전 춘추전국시대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아버지 ‘여불위’는 大商人이었고 큰 공을 세워 重臣이 됐고 마침내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여불위도 뛰어난 인재등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을 즐겁게 하고 얼마나 탐익하는지 관찰한다. 그 사람을 기쁘게하고 얼마나 자제하는지 본다. 그 사람을 괴롭히고 얼마나 인내하는 살핀다. 그 사람을 두렵게하고 얼마나 침착한지 본다. 그 사람을 화나게하고 얼마나 삭이는지 본다” 여불위가 상업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를 제대로 골라쓴 덕분이다.
1천수백년전, 2천수백년전의 인재선발법이 오늘날의 것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대따라 관행도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변함 없는 바른 길은 늘 그대로 있기 마련이고, 人事가 국가흥망을 좌우한다는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좋은 인재를 골라내지는 못하더라도 엉터리를 등용하는 일만이라도 없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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