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라고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삶의 주변에서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을 향하여 왜곡되게 나타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신神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와 같은 부모의 사랑이 근간에 와서 왜곡되거나 아니면 자기 합리화의 사랑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강물 속으로 자녀를 던지는 것도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극약을 먹여 함께 죽는 것도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어른들도 있다. 정도의 문제겠지만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어른들도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울수록 증가 추세에 있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사랑의 표현 방식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 어른들의 전유물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상실해 버린 것인지 사랑이 혼미해져가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살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특정한 몇몇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다섯 가지가 채워져야 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 밥을 채워야 하고, 지식을 채워야 하고, 돈을 채워야 하고, 명예를 채워야 하고, 권세를 채워야 하고, 그리고 재미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즉 성공출세가 곧 삶의 만족도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채워진다고 할지라도 정녕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삶이라면 그것은 외로움이고 고독함의 삶이 된다. 그렇기에 사랑은 오고가는 세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한결같이 사람과 세상의 노래가 되어 왔던 것이고, 지금도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의 화두는 사랑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노래를 들어도, 영화를 보아도,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도 사랑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들려지고 보여 진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실상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사랑의 목마름 때문일 수 있다. 사랑의 목마름을 채울 길이 없기에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을 수밖에 없을 수 있다. 현실은 아노미 현상이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 있다. 혼돈과 갈증을 외면할 길이 없다. 혼돈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치인들과 백성간의 사랑이든, 노사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남녀의 사랑이든, 부모자녀간의 사랑이든 상관없이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고 여겨진다. 이럴 때 사랑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혼돈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능히 감당하고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냥 갔다가 돌아와서 집 뜰의 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우리 집 개가 내 앞을 냅다 달려가는 것이었다. 개는 갑자기 걸음을 늦추더니, 마치 무엇인가 냄새를 맡은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면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가던 내가 그 곳을 보았더니, 거기엔 어린 참새 한 마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는 노랗고 머리엔 솜털, 둥지에서 떨어진 이놈은 반쯤이나 털이 돋아났을까 말까 한 날개를 포드득포드득 거리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채 움츠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개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가까운 나무 위에서 가슴이 꺼먼 늙은 참새 한 마리가 바로 개의 콧등 앞에 마치 돌멩이처럼 내려 박혀 앉았다. 그리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죽음을 무릅쓰고 애처로운 소리로 지저귀어 대면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아가리를 딱 벌린 그 개 앞으로 두어 번 깡충깡충 뛰어 나갔다. 한데 이 어미 새는 공포에 질려 그 조그만 몸통을 벌벌 떨어대며 울음소리는 거칠다 못해 사뭇 쉬어 버렸다. 이윽고 어미 새는 실신하고 말았다. 자기희생! 개도 그 힘을 알아차리고 뒷걸음칠 쳤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개를 황급히 불러선, 경건한 마음을 가득히 지닌 채 그 자리를 떴다.”
오늘의 아노미적 갈증·목마름은 사랑으로의 치료 외에 대안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사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든, 이성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친구간의 우정이든 오늘의 병든 삶을 건강하게 회복해 가는 길은 사랑을 위하여 살아가는 길 뿐이다.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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