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의 할아버지를 산에 갖다 버리고 내려오는데 손자 녀석이 빈 지게를 도로 가지고 나섰다. 이제는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한사코 빈 지게를 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다음에 아버지를 지고 올 때 쓰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어디서들은 우화의 한 도막으로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이런 일화가 자꾸 떠오른다.
젊음을 뽐내고 으스대는 사람들, 언제까지 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힘이 있다고 뽐내는 사람들, 언제까지나 그 힘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지. 젊다고 으스대는 사람은 늙어서 서러움을 당하게 되고 힘으로 으스대는 사람은 언젠가는 보다 더 큰 힘에 의하여 쓰러진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는 이분법적 논리에 젖어들게 되었다. 보수 아니면 진보, 여당 아니면 야당, 좌 아니면 우, 흑 아니면 백이라는 사고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흑도 백도 아닌 경우를 회색분자라고 하여 폄하하는가하면 어느 한 쪽에라도 소속되어 자기의 목소리를 낼 때 존재 가치를 느끼는 것 같다.
지역주의를 정권 창출에 교묘하게 이용한 정치권이 이번에는 노소의 대립을 이용하려 하고 여기에 이분법적 논리를 적용, 구세대는 수구요, 신세대는 개혁이라며 편가르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구세대는 무조건 오염된 사람이고 신세대는 무조건 참신한 사람일까. 구세대는 무조건 수구세력이고 신세대는 무조건 개혁세력일까. 보수도 진보도 추종치 않는 이는 무능하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일까. 개혁이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일까.
새로운 것을 찾고 보다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적 성정이며 선조 들은 끊임없이 가치 지향적 삶을 추구하여 왔다.
苟日新(구일신)이어든 日日新(일일신)하고 又日新(우일신)이니라.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한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라는 중국 고전 대학에서의 가르침이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세숫대야에 이 글을 새겨놓고 매일 아침에 읽으면서 자기의 생활을 개선하였다고 전해진다.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라고 보면 이는 특정한 연령에 국한되는 행위가 아니다. 개혁은 종전의 것을 보다 훌륭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전후, 좌우, 옳고 그름을 가리는 안목과 합·불합리를 판별하고 개선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개혁의 조건이다.
밀어붙이는 힘이나 열정만이 개혁의 조건이며 젊은이의 특권이라는 편견을 버리자. 뽐내는 젊음보다 겸양하는 젊음이 더 아름답고 부가가치가 높다. 젊은이 중에도 바르지 못한 사람이 있고 늙은이 중에도 참신한 사람이 있다. 바르지 못한 열정이 무슨 소용이며 한 때의 불타는 정열로 훌륭한 삶과 밝은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개혁은 일생을 통하여 꾸준히, 그리고 끊임없이 가꾸어야하는 삶의 과정이요,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발자취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단체나 개혁이라는 행동 이전에 겸허한 수양이 따라야 한다.
편견과 오류는 개인의 삶이나 사회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바이러스이므로 떨쳐버려야 한다. 개인적 삶의 모습도 사회의 모습도 매우 다양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사람, 여당도 야당도 아닌 사람이 더 많은 오늘날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떨쳐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자.
사람의 의식은 년식(年式)에 따라 구별되어지는 기계가 아니다. 노소가 어울려 동락(同樂)하는 세상, 신세대와 구세대가 어울려 밀어주고 끌어주는 밝은 세상이 복지 국가요, 선진 사회다.
서 강 홍
<예천교육청 학무과장>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