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다. 지난 IMF 때 보다 더 자주 듣는다. 얼마나 어려우면 어렵다 하고, 얼마나 힘들면 힘들다고 할까? 오히려 어렵고 힘들다는 말에 전적 공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이상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어려움과 힘듦이라는 말은 상대적일 수 있고, 또한 자기 기준일 수 있다. 평균적으로 정해진 기준이 없는 말이다. 어렵다고 느끼면 어려운 것이다. 힘들다고 느끼면 힘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안타까운 것은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 계속되면 희망이라는 것이 상실되고 함몰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사치품이 될 수가 있고, 그야말로 거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게 하소연했다. 자신이 몸이 아파 약 1년간 병원신세 지고 있을 때, 어느 누가 먹을 것 그냥 가져다주는 사람 없었단다. 그 때까지는 자기가 믿는 神을 찾고 기도도 열심히 했지만 神은 결국 자신을 도와주지 않더란다. 1년여 세월이 지난 후,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마음 한 부분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동안 그래도 내일이라는 꿈을 소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지금의 어렵고 힘든 현실 앞에서 얼마나 사치스런 흉물이었던가를 발견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는 내일에 대한 꿈이나 희망은 현실에 어느 정도 안정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내일 아침 당장 약값, 치료비, 그리고 먹고 입을 것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허상일 뿐이더라고 절규했다.
공지영님의 소설 <봉순이 언니>는 어렵고 힘든 한 시대를 살아갔던 파란만장한 봉순이라는 여주인공의 삶의 이야기다. 가정부 출신이 고작인 봉순이는 더 이상 꿈도 희망도 필요 없는 존재다. 남자 복도 없었고, 가진 것이나 배운 것이나 어느 한 가지 내세울 것이 없는 바보스런 여자에 불과하다. 있다면 살아있다는 현실만이 그녀의 전부였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딘가 또 살고 있다고 필시 확신하기에 그의 작가 후기에 이런 글을 남겼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시대에 절망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허망해져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한때는 나도 허무의 뭉게구름 엷게 흩뜨리며 우아하게 도피하고도 싶었다. 절망하거나 허망한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허망의 구름다리 위에서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사유는 현실의 벽을 자유롭게 뛰어넘어 무궁무진 피어오르고 때로는 악마적으로, 그래서 유혹적으로 아름다우리라…. 그래. 그것은 달콤하고 서늘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형벌처럼 내 마음 깊숙이 새겨진 단어 하나.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간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희망은 수첩에 약속시간을 적듯이 구체적인 것이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처럼 구차하기까지 한 것이지만, 나는 그저 이 길을 걷기로 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작가라서가 아니고, 내가 고상한 인간이어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냥 그것이 뭐랄까 내 적성에 맞기 때문이라고 대답할밖에….>
누구에게나 완전 절망도 완전 희망도 없는 법이다. 세상은 공평한 법이다. 단지 자신의 처한 힘듦과 어려움의 상황을 가지고 희망의 세계를 덮어 버렸기 때문에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희망은 사치품이나 장식품이 아니다.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삶의 선물일 뿐이다. 희망은 오늘의 어려움과 힘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예방약이다. 희망을 간직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의지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도 희망만이 희망이다. 희망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한 오늘의 어려움도 힘듦도 언젠가는 비켜서는 날이 오리라. 그 날까지만, 그 날까지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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