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주변은 ‘과거’ 라는 말이 담론의 주제가 되어있다. 살아오면서 오늘날처럼 ‘과거’라는 말을 많이 들어 온 기억이 없다. 대중가요의 ‘과거는 흘러갔다’ 가사 내용 외에는 정말로 ‘과거’라는 말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들어 온 기억이 별로 없다. 혹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과거란 시간적인 의미에서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작금에 논의되고 있는 ‘과거’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도 아닌 것 같고, 실패나 실수의 교훈을 찾아보자는 교훈적인 의미도 아닌 것 같다. 무엇인가 모르게 살벌함과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는 부정과 긍정은 존재해왔고, 부정은 긍정을, 긍정은 부정을 통하여 역사는 발전해 왔다. 그런데 과거의 잘못을 오늘 이 시점에서 찾아내서 단죄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다면 또 다른 하나의 과거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또한 조상의 죄를 오늘의 후손이 몽땅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연좌제로 개인의 삶을 파탄 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기관도 권력도 조상과 연결하여 개인의 삶을 앗을 수 없다. 일본의 앞잡이로, 공산당의 앞잡이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후손을 찾아내서 그들의 모든 기득권을 박탈해 버리자는 논리,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 과거의 행적이 수상쩍은 사람의 후손들은 누군가? 를 찾아내 보자는 것이 과연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얼마나 큰 유익과 보탬이 될 것인가? 좁은 소견에 의구심이 간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공간일 뿐이다. 동일한 색깔로만 모여진다면 세상은 무미건조해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들만이 모여서 살아보자고 만들어진 집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과 이론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도 몰락의 위기를 걸어가고 있는 집단들도 있다. 세상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 획일적인 사상을 강요하거나 추종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세상이라고 할 것이 없다.
정녕 과거를 논하자면 자신의 살아 온 삶을 반성하고, 돌아보며, 어떻게 하면 주어진 현재의 위치와 자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더 성실하게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살펴볼 목적이 되어야 한다. ‘나는 걸릴 것이 없으니 어디 한 번 조사해 보자.’는 심사는 이미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과거를 뒷조사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과거를 알아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세상도 비뚤어져 보인다. 세상은 정상적이다. 자기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가 중요하다. 이탈리아의 피사라는 곳에 가면 사탑斜塔, 곧 기울어진 탑이 있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탑이다. 이 탑은 1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8층 높이의 탑이다. 그런데 이 탑은 세울 때부터 한쪽 기반이 내려앉아 지금도 탑 전체가 수직면에서 5도30부 정도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맨 꼭대기에는 수직면에서 5.2미터 정도 기울어졌다. 만약 이 피사의 사탑이 자기의 시각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아울러 자기 이외의 세상은 전체가 다 비뚤어졌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정반대다. 자기만 비뚤어진 것이다. 자신의 비딱한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전부 다 비뚤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자기가 비뚤어졌다고 고집하는 세상은 오히려 바르게 서 있다. 우리는 내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를 보기 보다는 미래를 보는 희망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 모두는 내일을 향해 꿈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때이다. 과거를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뛰어넘어야 한다. 과거 속에 우리의 희망과 미래를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과거의 아픔과 모순을 뛰어넘는 슬기로움이 필요할 때이다.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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