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독일의 관계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 시대의 <관계>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나와 너>의 관계가 상실되고, <나와 그것>만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즉 인격과 비인격의 관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가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만 있고 <너>는 없는 시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아스러울 때가 있다. 마틴 부버의 지적이 실감난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남아있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유효한 명언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설사 그 말이 자아를 냉철하게 살펴보라는 권유의 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를 묻지 않으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지는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전에 <나는 누군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나>를 보면서 <너>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비극이 아니고, 또 다른 <너>에게 아픔을 안겨주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나는 누군가?>를 묻지 않고 <너는 누구냐?>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너>를 찾기에 급급하고, 어제의 <너>는 누구였는가? 에 대해서 줄기차게 질문하고 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정작 <너는 누구냐?> 하면서 찾는 <나는 누구냐?>를 질문하고 스스로를 향해 반추해 보는 이들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한 시대다.
벤저민 양Benjamin Yang이 쓴 <덩샤오핑 평전>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문화 대혁명은 실로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마오쩌둥이 채택한 접근법은 ‘난장판이 되면 될 수록 더 신난다.’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전국대학 및 고등학교 학생들 1400만 명과 홍위병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대형 집회를 아홉 번이나 열고 자신이 직접 참여해 자리를 빛냈으며,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성장省長, 시장, 당 간부들에 맞서 반항하라고 사주했다. ...뚜렷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 자신의 정치적 생존과 신체적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은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숨겨놓고 있었다.
오로지 <너>만 보면서 <너>를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나를 보지 못하고 너만 보게 하는> 존재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너>에게 투쟁하도록 독려했고, 수많은 <너>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나>는 보지 못하고 <너>만 보고자할 때 우리는 투쟁할 수밖에 없고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진정으로 나를 보지 못하면 <너>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너>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여 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인가?>를 먼저 보면서 <나>로부터 <너>를 보는 사람은 <너>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준다.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 <나>가 소중한 만큼이나 <너>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를 보지 못하면 모두가 투쟁의 대상이다.
결국 <나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난장판이 되면 될 수록 더 신난다.”는 사고방식은 결국 <너>를 총칼로라도 짓누르고 <나>는 <너>를 정복하고 짓밟고 말겠다는 무서운 의미의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내가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너는 누군가?>를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군지 숨겨놓거나 아니면 미화시켜 놓고 너만을 상대로 누구냐 물으면서 답을 찾아내겠다고 덤비면 결국 우리 사회는 “난장판”이 되고, 난장판이 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더 신바람 나는 사람들은 과연 누가 될까?
이 만큼 했으면 족할 때가 된 듯싶다. 엇갈리고 또 엇갈리는 <엇갈림의 관계>는 이제 연합과 화평의 관계로 승화 시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만큼 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만큼 알았다. 더 이상 비참해지고 불쌍하게 되는 이웃들이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또 다른 <너>를 향해 용서와 포용과 이해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다.
난장판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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