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500년은 27명의 왕이 통치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명군으로 世宗과 正祖를 꼽는다. 두 임금은 개혁군주로 통치기간중 숱한 업적을 남겼다. 이 임금들의 으뜸 덕목은 공평한 인사정책이었다. 패거리 편중인사를 멀리하고 인재를 능력위주로 골고루 기용, ‘탕평인사’를 철저히 시행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많은 새로운 인재들을 육성, 그들을 정치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 최대한 활용했다. 집현전의 연구과정은 보통20년, 초기 10년은 기초학문을 연구하고 나머지 10년은 그 기초를 바탕으로 새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세종은 인재양성에 20년이라는 장기투자를 했으며 면밀한 검정을 거쳐 가며 길러낸 인재를 두고두고 썼던 것이다. 요즘처럼 별 검증없이 기용했다가 말썽이나면 금방 팽개치는 ‘일회용 인스턴트식 인사’와는 판이했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선택하는데도 뛰어났지만 신하를 적절히 활용하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세종의 빛나는 유산과 업적은 그의 출중한 지도력과 공평한 인사의 소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에서 가장 개혁적 군주로 평가받는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격렬히 반대한 노론에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적과 동지를 가리지않는 탕평인사로 일관했다.
정조의 人事는 독특했다. 당장 쓰고 싶은 인재라도 8년간 지방에 보내 중앙정계와 격리시켰다.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살피고 몸소 경험토록 한뒤 중앙에 다시 불러 현장체험을 정치에 반영하도록 했다.
정조는 사회전반의 개혁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을 많이 기용했으며 그들의 저서도 깊이 읽고 정치에 반영했다. 정조는 새로운 인재를 배출하고 고루 등용하기위해 규장각을 설치했다. 그리고 과거의 인물들도 소외시키지 않고 적절한 권력안배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개혁군주로 성공할수 있었던 정조의 리더십 요체는 공평무사한 인사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국정혼란은 낙하산인사와 편중인사가 근절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무성하다. 여의도 증권가를 가리켜 ‘금융감독원2중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서 ‘낙하산 편대’가 우박처럼 떨어진다. 公職은 私有物이 아닌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