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3국을 통일한 힘은 天台사상에서 나왔다. 6세기 중국에 ‘지의법사’가 있었는데 그를 천태대사라 불렀다. 그는 草木에도 佛性이 있다 했고, 현실세계는 空이고, 假飾(가식)이니 집착하지 말고 中을 택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一心三觀이니, 지옥과 인간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心中속에 있다는 것이다.
또 會三歸一니, 小乘 大乘이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차별의식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신라의 원효, 고려의 義天, 조선조의 雪岑(설잠·김시습) 등이 이 사상에 심취했고, 국가적 난제들을 해결할 길을 여기에서 찾았다.
天台사상은 종교적으로는 불교화합의 원리였고, 정치적으로는 국론통일의 근본정신이 된 것이다. 禪宗과 敎宗이 팽팽히 대립해 있을 때 이를 통합했고,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가는 3개의 방향’이라 해서 ‘단합’시켰다.
11세기 고려 11대 文宗이 아들들을 모아놓고 “누가 福田(중)이 되겠느냐?” 물었더니, 11세된 4째아들 의천이 “저요!”했다. 그는 공부에 취미가 많아서 유교, 불교, 제자백가 등등 눈에 보이는 책은 다 읽어젖혔다.
당시 중국은 宋나라시절이었는데, 武宗이 도교에 빠져서 불교를 탄압하고, 내란까지 겹쳐 불교서적은 거의 불탔다. 의천은 30세 되던 해에 불교서적을 잔뜩 배에 싣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년만에 돌아왔는데, 왕에 사정해서 ‘화엄경 3종 번역본과 장경각 건립비 2000냥’을 중국 정원법사에 보냈다.
이에 정원법사 혜인원을 高麗寺라 이름을 고치고 의천의 塑像(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봉안했다.
의천대사는 1097년 국청사를 완공하고 초대주지가 됐는데, 그 門中에 구산선문의 선종승려와 화엄종의 교종승려 1천여명이 모여들었고, 이 자리에서 ‘고려조 천태종’이 처음 열렸다. 천태종은 고려조의 대표적 종파였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쇠퇴해졌다.
11월의 문화인물로 문광부는 대각국사 義天을 선정했다. 一心三觀, 會三歸一. 東西가 남이 아니요, 남북이 둘이 아니요, 대통령과 官吏와 백성이 사심을 벌리고 하나의 목적위에 설 때, 국가도 강성해질 것인즉, 천태종의 開祖 의천를 선정함은 그 염원이 담겨져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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