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도 감귤이 한반도에서 재배됐다. 일본 古代史에 “상세국(제주도)에서 감귤을 수입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일본은 감귤나무를 대량 재배해서 합방 직후인 1911년에는 오히려 일본산 온주밀감을 제주도에 심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감귤이 귀했고 귤껍질의 향기 때문에 ‘신비의 과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대궐에만 납품되는 진상품이었다. 제주도 밀감이 한양에 도착하는 날은 축제일이었다. 성균관과 동서남북 4개 학교 유생들을 모두 모아놓고 科擧를 보였으며, 참가자들에게 감귤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제주도 감귤농장은 이것이 애물단지였다. 7~8월에 귤열매가 탱자만하게 열리면 제주목사가 그 수자를 일일이 장부에 적었다. 수확할 때 한개라도 모자라면 엄히 벌했다.
과일이란 저절로 떨어질 수도 있고 벌레먹을 수도 있으니 그 수자가 일치할 수 없었다. 그것을 맞추려고 관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 수탈을 견디다 못한 귤나무 주인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죽여버리곤 했다.
橘은 孝의 상징이었다. 東漢시대에 陸績(육적)이란 효자가 있었다. 그는 6살때 袁術(원술)의 집에 심부름을 가게됐다. 부자였던 원술은 이 꼬마손님에게 귤을 대접했다. 그런데 육적은 그것을 먹지 않고 소매속에 넣었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어머니깨 드리려고요” 했다. 주인은 그 효성이 가상해서 귤 몇개를 더 주었다. 여기서 懷橘(회귤·귤을 품음)은 효도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대감이 경상도체찰사로 영천에 왔다. 그때 무장이며 시인인 노계 朴仁老선생을 초청해 홍시대접을 했다. 그 때 노계가 지은 ‘조홍시가’가 전해진다. “반중 조홍감이 좋아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즉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노라”
그 귀하던 밀감이 지금 천덕꾸러기다. 산길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것이 귤껍질. 처량한 감귤신세를 보면서 옛가치관을 생각한다. 명예, 양심, 청렴, 강직, 윤리, 효성 등등 先人들이 존귀하게 여겼던 가치들이 오늘날 땅바닦에 늘린 쓰레기 취급이다. 썩은 윗물들의 악취과 ‘습관성 거짓말’을 씻어낼 신묘한 밀감향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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