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라 손권은 용인술이 조조나 유비보다 나았다. 19세에 정권을 물려받은 손권은 우선 형 손책의 유신(遺臣)들을 중용, 주유에겐 군사 대권을, 행정은 재상 장소에 맡겼다. 권력을 잡으면 능력과 경륜을 무시하고 자기 사람들로 물갈이하는 인사를 손권은 하지 않았다.
그는 주유의 천거로 젊은 인재 노숙을 기용, 대외전략의 브레인역을 맡겼다. 촉의 전략요충지며 관우의 본거지 형주를 탈환할수 있었던 것도 무명이나 다름없던 육손을 총사령관에 발탁한 덕분.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손권은 몸을 굽혀 치욕을 참고, 인재를 잘 쓰고, 策士를 존중할줄 아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가 천하의 영웅호걸 조조, 유비와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합리적인 인사정책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젊을때 영명하던 손권도 늙어가면서 인사시스템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손권은 ‘장남’이 죽자 장남의 이복동생인 손화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자신이 총애하던 세자의 동생 손패를 노왕(魯王)으로 봉해 세자와 같은 대우를 했다. 권력의 향방에 민감한 신하들은 세자파와 노왕파로 갈라져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형주에 머물고 있던 丞相(승상) 육손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쟁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세자와 노왕의 처우는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전 같으면 충간에 귀를 기울였을 손권이지만 이때는 그 간언을 묵살했다.
노왕파의 모함을 들어 손권이 문책사를 보내자 육손은 분통이 터져 죽었다. 8년간 계속된 파벌싸움으로 국정 혼미가 극에 이르자 손권은 뒤늦게나마 결단을 내려 세자는 폐세자하고 노왕과 그 일파는 모두 처형했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기울었다.
군사정권을 종식시킨뒤 YS정부는 ‘인사가 만사’라는 기치를 들었으나 YS의 ‘감짝쇼인사’로 亡事가 돼버렸다. 그뒤 ‘탕평인사’를 내걸었지만 늦었다.
DJ정부도 끼리끼리 나눠먹기식 ‘편파인사’ ‘낙하산 인사’로 역시 ‘인사가 亡事’라는 국민의 비난을 받고 있다. 최근 한 공기업사장의 낙하산인사로 국민의 지탄을 자초했다. 아무래도 낙하산 인사는 이 정권의 고질병인 것 같다. 이것도 ‘노인정치’의 老慾(노욕)인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