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천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비루투(virtu·미덕)’.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귀족으로서의 책무)’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사익보다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先公後私’, 궂은 일에 앞장서는 ‘솔선수범’의 정신이 ‘팍스로마’를 이룬 원동력이었다.
로마의 명문중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지닌 귀족의 아들로서 가만히 있어도 편안히 일생을 살수 있었던 ‘그라쿠스’형제는 서민과 농민들을 위해 귀족재벌들의 개혁을 추진하다 암살당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어린 후계자 한명만 남기고 전가족이 일반시민보다 먼저 전장에 나가 전사했다. 이처럼 로마 지도층의 국가적 사회적 책무의식은 철두철미했다.
기원전5세기 폭군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로마공화정을 세운 집정관 부루투스에겐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웃나라에 망명중인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옹립, 왕정복구를 모의하던 무리속에 부르투스의 두아들도 끼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부루투스는 ‘두 아들의 국외추방’을 결정한 원로원의 결의를 묵살하고 자식들을 역모죄로 처형해버렸다.
부루투스의 전우였던 집정관 발레리우스는 로마시 언덕위에 궁궐같은 대저택을 갖고 있었다. 로마시민들사이에 그가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는 지체없이 그 집을 허물고 변두리 달동네에 작은 집을 지어 이사했다. 그리고 항상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로마시민들이 들여다 볼수 있게 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에게 항소권을 주는등 열린정치를 폄으로써 ‘공공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푸블리콜라’로 불려졌다.그가 죽은후 그 많던 재산이 로마시민들을 위해 다 쓰여졌음을 안 시민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장례식을 치렀다.
당내분에 휘말려 있는 이회창한나라당총재가 ‘빌라게이트’라는 악재로 인기가 급락, 대권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지난 대선땐 아들들의 ‘병력게이트’로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더니 이번엔 호화빌라문제로 구설수를 자초, 도끼로 자기발등 찍는 낭패를 보고 있다.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정치지도자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결여’가 이총재를 다시 위기로 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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