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나라 유비는 제갈공명에게 대업을 이룰 계책을 물었다. 공명은 “조조, 손권과 3국정립의 국면을 만들어 익주를 취하며, 대외적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대내적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리면 틀림없이 폐업을 이룰 것입니다” 고 설명했다. 이것이 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당시 세력판도는 중국의 대부분을 위나라 조조가 차지하고, 강동의 몇몇 고을은 오나라 손권이 장악하고, 남은 것은 고작 한중(漢中)의 형주와 익주 두 곳뿐이었다. 위나라가 압도적으로 크고 넓기는 하나 지세로 보아 오나라를 넘볼 형편은 못됐다.
지역이 험준한 천연요새 형주와 곡창지대 익주만 손에 넣으면 비록 땅덩어리가 작다해도 능히 위나라와 겨룰수 있으며, 오나라와 동맹관계만 맺게되면 위가 강국이라도 맞설수있다고 공명은 분석했다.
형주엔 유표가, 익주는 유장이 지배하고 있으나 그들의 힘은 보잘 것 없어 그 두 곳은 쉽게 손에 넣을수 있다는 것이 공명의 심산이었다. 공명의 천하삼분론은 지세에 바탕을 둔 삼각역학이며 계략적으로는 견제에 역점을 둔 전략이었다.
공명의 전략대로 위·오·촉 3국이 정립하는 천하삼분은 이뤘으나, 공명은 천하통일엔 실패했다. 유비가 죽은후 3국의 세력분포는 위나라가 12주, 오나라가 4주, 촉나라는 익주 1주뿐이었다. 형주도 이미 오나라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만약 위가 공격해오면 촉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판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죽느니 차라리 승부수를 던져 요행히 유리한 상황을 만나면 일거에 천하통일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 공명의 계산이었고, 그는 6번이나 북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 결국 병을 얻어 죽는다.
공명은 자신이 쓴 병서 ‘장원(將苑)’에서 “군사를 일으키는데 있어 지혜로운 자는 하늘과 때와 사람에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공명의 북벌실패는 ‘天·時·人’ 세가지를 모두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후세사람들의 평가다.
朴근혜의원의 3당구도에 의한 대권쟁패의 ‘三分之計’가 뜻밖에 ‘盧風’ ‘IJP 충청권 신당설’ 돌출로 ‘태산명동에 서일필’이 될 공산이 크다. ‘天·時·人’이 잘못된 탓인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