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수도 양곤의 아웅산장군 묘소에서 대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전두환전대통령과 외교사절들이 참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천정에 설치돼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다. 세계 외교사상 유례 없는 테러폭발사건이었다. 서석준부총리와 기자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기백 합참의장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얀마정부는 테러범 2명을 잡아 사형을 선고했고 북한과 외교를 단절했다.
아웅산(Aung san)은 미얀마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그는 랑군대학시절 스트라이크 주동자였고, 턴키당의 서기장이 됐다. 영국이 체포령을 내린 40년 8월 지하로 숨었다가 일본으로 탈출,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아 2차대전때 미얀마로 진격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다시 45년 연합군의 대반격에 가담해 일본군을 축출했다.
47년 영국 총리 애틀리와 맺은 ‘애틀리-아웅산 협정’에 의해 미얀마의 독립은 가시화돼갔다. 그러나 그 해 7월 각료회의 도중 동생을 포함한 각료 7명이 함께 암살당했다.
그의 딸 아웅산 수지는 15세에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웠고 88년 귀국,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있는 군사독재정부에 저항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민주연합’을 구성한다.
아웅산 수지는 90년 총선에서 압승하지만 군사정부는 정권을 넘기지 않고 그녀를 ‘국가 단합과 안정을 해친 죄’로 가택연금시킨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녀는 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두차례에 걸쳐 가택연금을 당했던 그녀는 지난 5월 6일 19개월만에 연금에서 풀렸다. 국제여론이 무서워서 살해할 수는 없었는데, 이번의 解禁도 ‘국제사회의 강한 경제제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취한 조치다.
영국 압제를 벗고 독립을 쟁취한 ‘미얀마 영웅’의 암살도 비극이지만, 선거에 이기고도 정권을 넘겨받지 못하고 ‘국제여론’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온 그 딸의 처지도 비극이다.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호는 바뀌었지만 ‘독재정치’는 변함 없는 것도 비극이다.
아웅산 수지여사가 연금해제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며, 우리 외교사절 30명의 비극이 19년만에 회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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