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에 나온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문체의 대혁명이고, 당시의 고답적인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문체에 대한 반란이었다. 뛰어난 화가요, 포용력이 남달랐던 正祖임금도 연암의 문체에 시비를 걸었다. 자질구레한 市井잡담, 애당초 글의 소재조차 되지 못했던 여자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암의 ‘소설’들은 당대 사대부들의 권위와 자존심을 심히 흠집내놓았던 것이다.
正祖임금은 “근자에 文風이 난잡하게 된 것은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뒤로…”라 성토하고, “바른 글을 지어올리면 벼슬을 줄 것이요, 아니면 무거운 벌을 줄 것이다”했다. 연암은 “눈앞의 일속에 참된 정취가 있거늘 어쩌자고 머나먼 옛날에서 찾는가”라고 하면서도, 御命(어명)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인들은 한결같이 “우리 모두의 문체는 열하일기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중국에도 수능 비슷한 대입자격시험이 있는데, 한 학생이 ‘답안혁명’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작문시험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감정의 親疏(친소)와 사물에 대한 인식’이라는 문제에서 한 학생이 “애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생각하고, “창문 커튼을 열면/ 햇살은 한 가지 빛깔일 뿐”으로 시작되는 시를 한수 적어놓았다. 학생의 배짱도 가관이지만, 채점관의 안목도 개혁적이었다. 그 답안에 ‘만점’을 주어버린 것이다. 언론들은 당연히 입방아를 찧어댔지만, 북경대학의 한 교수는 “현대詩로 쓴 답안에 만점을 줄 수 있는 중국사회는 분명 좀 더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일 것”이란 말로 논쟁을 말렸다. 미국의 수능시험인 SAT는 학생의 능력중 일부만 측정할뿐이고, 생활속의 지혜를 측정하는 ‘실용지능’, ‘창의력’을 측정할 수는 없다 해서 예일대 교수들이 새로운 미래의 시험문제들을 개발하고 있다.
“식사를 한 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격이 까다로운 친구와 잘 지낼 방법”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모임에 갔을때 어떻게 할 것인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방법” 등을 묻는 시험문제가 앞으로 많이 개발될 모양이다. 교과서 달달 외우는 ‘복사기 머리’ 가지고는 안되는 시대가 벌써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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