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오후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고 김달선 할머니의 빈소. 연합

지난 12일 낮 12시께 김만금(73) 할머니는 온몸에 힘이 빠진 모습으로 고인이 된 언니 위안부 피해자 김달선(91) 할머니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 고 김달선 할머니의 동생 김만금씨

김만금 할머니는 지난 11일 오후 9시15분께 고된 생활을 이겨냈던 언니가 마지막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을 때 그 앞을 지킨 유일한 혈육이다.

유족이라고 해야 김 할머니와 그 아들·손자가 전부였고 언니의 호적에 등록된 남편·자녀는 없었다.

이 때문에 언니가 수년전 대구에 입원한 뒤에도 일주일에 1~2번씩 거르지 않고 문병을 다녔으며 지난 1월21일 장성로뎀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알뜰히 살폈다.

빈소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메르스 때문인지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빈소를 찾는 손님도 드문드문 드나드는 공무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아들과 함께 빈소를 지키는 김 할머니의 얼굴에선 슬픔이 겉으로 배어나왔다.

김 할머니가 기억하는 언니는 야물고 당찬 여성이었다.
언니는 생활력이 강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으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언니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이런 강한 여성이었기에 숨지기 며칠 전까지 김 할머니가 "언니 나 알아?"라고 물었을 때 언니는 눈을 부릅뜨고 동생을 보며 '당연히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뇌경색에 허리 협착증·치매까지 앓고 있었던 언니였지만 동생이 있는 순간 만큼은 삶의 의지를 내비쳤던 것이다.

김 할머니는 언니가 위안부에서 어떤 생활을 겪었는지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 생활의 기억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모습은 숱하게 지켜봐왔다.

특히 언니가 한 말 중 "배가 너무 고파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벌레를 주워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며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라는 말은 가슴을 옥죄었다고 김 할머니는 말했다.

더욱이 일본군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절벽으로 올라가 뛰어내리려고 했다는 얘기는 그 고생을 감히 짐작케했다.

김 할머니는 언니의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도록 교회에 다닐 것을 권했고, 언니는 포항에 있을 당시 교회에 출석하다 60세가 넘어 대구 한 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았다.

김 할머니는 "언니가 교회에 다니며 위로가 됐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마음의 평안을 받았을 것으로 바란다"고 말하며 언니의 영정사진 쪽으로 고개를 한번 돌렸다.

언니는 평소 자신의 조모를 많이 따랐다.
그래서 한날 언니는 울며 김 할머니에게 "나 죽거든 화장을 해서 할머니 묘 뒤에 곱게 뿌려달라"고 했으며 결국 이것은 마지막 유언이 됐다.

김만금 할머니는 "언니가 많이 힘들어 했고, 우는 모습도 많이 봐왔다"며 "불쌍한 언니 힘든 삶을 살았으니 이제는 편히 쉬길 바란다"고 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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