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수록 아름다워지고 멀어질수록 더 또렷해지는 고향은 살아있는 고전이다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고향에 가도 고향은 없다.

나를 기른 어린 날의 개울도, 나무도, 들판도 서로가 서로를 몰라볼 만큼 달라졌다. 기억 속에서 더 정겨운 고향. 그곳에 가면 고향이 더 안 보인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이란 노랫말처럼, 멀리서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천천히 보이기 시작한다.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매우 많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은 오직 자기 성찰뿐이다' 라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했듯이 '되돌아봄'이 고향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향의 아름다움은 상실감 속에 살아 있다. 망각과 그리움에 남아있다. 정작 들뜬 마음으로 고향 마을에 들어서면 '어휴!' 낯선 개들만 죽어라 짖어댄다. 컹컹대며 짖어대는 건 개들만이 아니다. 텅빈 집들, 건조물들, 개망초 우거진 버려진 땅들. 모두 우두커니 입을 떡 벌리고 적막을 견뎠다고 유세다. 현실은 이렇다. 익은 감들, 밤들이 지천으로 떨어져 발에 밟혀도 누구 하나 주울 사람이 없다. 낯익은 얼굴들은 하나 둘 떠나고, 낯선 사람과 짐승들이 정든 마을을 대신 지킨다.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고, 대화를 해도 어딘지 핀트가 잘 맞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있어주지 못한 땅을 지켜온 그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참 고맙다. 어느 땅이든 지키는 자의 것 아니랴.

다가갈 수 없는 것,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더 그리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늘 살아있는 고전이다. 로마의 허물어진 건물들처럼,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그런 상실감에서 고향은 더욱 애틋하다. 잊힐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멀어질수록 더 또렷해지는 반비례의 미학으로 우리는 고향을 오래 기억한다. 고향에만 평생 사는 사람은 실제 고향의 의미를 잘 모른다. 낯익은 시선이 품안의 진실을 가려 버린다. 이향, 탈향, 실향이 거꾸로 고향을 '낯설게' 만들어 지키고 기억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이국은 없다"(人無異國)고 최치원은 말했으나, 그런 코스모폴리탄적인 선언은 그가 이국에서 경험한 철저한 고향사랑에서 나온 것이리라.

야간 비행을 하던 생텍쥐페리가 아르헨티나로 날았던 첫날 밤의 인상을 회고한 적 있다. 캄캄한 밤, 지상에 반짝이는 불빛들을 쳐다보며 그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생각을 놓치지 않고 있는 '의식'임을 깊이 깨닫는다. "들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등불만이 별 모양 깜박이던 캄캄한 밤. 그 하나하나가, 이 어둠의 대양 속에도 인간의 의식이라는 기적이 깃들이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띄엄띄엄 이들의 불은, 저마다의 양식(糧食)을 찾아 들에 반짝이고 있었다"라고. 우리는 늘 이런 반짝이는 불빛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런 마지막 한마디가 바로 고향이다.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서양의 역사-지성이 봄에서 겨울로, 광명에서 흑암으로 흘러갔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네 정서엔 그런 종말이 없다. 원초로서의 고향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고향을 회상하는 사람은 그만큼 낙관적이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을 닿을 수 없다"는 고흐 식의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마음에 고향을 간직한 사람은 좌절해도 봄-광명을 기약한다. 살아서 닿을 '의미'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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