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보경(경기도 성남시)
제작실로 들어선 나PD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칼을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 검정색 칼집에 황금빛용이 주조되어 있는 칼은 다음 주 프로그램에 출연할 골동품 일곱 점 가운데 단연 눈에 띄었다. 나PD보다 내 손이 빨랐다.

칼은 대략 사십 센티 정도로 단검치고는 긴 편이었고, 주철로 만들어져 제법 묵직했다. 전체적으로 입혀진 검정색도 고급스러웠고, 칼집에 주조된 황금색용의 형태는 생동감이 넘쳤다. 그런데 은은하게 윤기가 도는 칼집과 달리 손잡이에는 군데군데 녹이 나 있었다. 제작 년대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녹을 만든 것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녹이 슨 부분에 혀끝을 갖다 댔다. 녹이 혀의 습기를 빨아들이며 자연스럽게 혀끝에 달라붙었고, 화공약품의 쓴 맛도 나지 않았다. 인위적인 녹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관상의 실수로 손잡이 부분에만 녹이 난 것이 분명했다.

두 손바닥 위에 칼을 올려놓고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묵직한 중량감으로 봐서는 철성분이 산화될 만큼 오래 전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묵직하면서도 속이 빈 느낌이 들었다. 도금의 상태로 봐서는 칼의 제작 년대는 아무리 높이 잡아도 백 년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속이 빈 거 같은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녀장을 풀고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어!"

나PD와 내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놀랍게도 칼 손잡이에는 칼날이 붙어 있질 않았다. 나PD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젠장! 이젠 하다하다 별 게 다 염장을 지르는구먼!"

냉소와 자조가 뒤섞인 한탄이었다. 지상파 방송에서 밀려나 백수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케이블 TV의 인기 없는 예능 프로를 만들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조소이기도 했다.

나는 칼날이 없는 손잡이 부분을 나PD에게 건네주고 칼집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칼의 정체를 알려주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과연, 손잡이와 맞닿는 부분에 조그맣게 승영(承影)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칼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칼날 없는 칼, 승영은 도가(道家)의 경전인 <열자(列子)>에 그 기록이 나와 있었다. <열자>탕문(湯問)편에 의하면 승영은 춘추시대 위(衛)나라 사람 공주(孔周)가 만들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북쪽을 향해 칼을 겨누면 어렴풋이 칼날이 만져진다고 했다. 이 칼을 지닌 사람은 천하를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후대에 곁들여져 전해 오고 있었다. 나PD에게 칼의 유래를 설명해 주자 그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번 프로는 이 칼 덕분에 시청률 좀 오르겠는데?"

나PD가 말했다. 피디로서의 감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이 칼은 누가 내 놓은 거야?"

내가 묻자 나PD가 자신의 아이패드에서 메모장을 열어 확인했다.

"경상북도 청송군에 사는 삼십 대 남자. 녹화 날 틀림없이 온다고 했어. 왜? 물건에 관심 있어?"

관심이 있었다. 나는 칼 주인에게 칼을 매도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나PD에게 부탁하며,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의 아이패드 케이스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다른 골동품들을 마저 감정해 소견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PD가 연출을 하고 내가 자문을 맡고 있는 예능 프로는 골동품 감정과 퀴즈쇼와 연예인들의 수다가 뒤범벅이 된, 내용적으로 특성이 명확하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들이 집에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을 출연(出捐)하면 패널로 등장한 연예인들이 그 골동품에 관련된 역사 상식 퀴즈를 풀면서 골동품의 감정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나PD와 고등학교 동창인 인연으로 고문을 맡긴 했지만, 출연자들의 무지함을 부각시켜 억지웃음을 유도하는 제작 방향은 식상하기만 했다. 안쓰러운 시청률은 이 프로그램이 조만간 폐지될 것임을 예측하게 했다.

녹화가 있던 날, 승영의 소유주와 연결이 될까 싶어 나PD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지 않았다. 원래가 자기 일에 몰두하면 전화기를 아무데나 팽개쳐두고 다니는 그의 습성을 아는지라 다음에 통화 하겠다 생각하고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방송이 나가고 이틀 후, 나PD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칼 주인의 연락처를 묻자 그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출연자의 신상 정보를 함부로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이 됐냐?"

"비꼬지 마라. 나도 앞으로는 원칙대로 살기로 했으니까."

단호한 말투였다.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대뜸 심욱동 선생을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 잘 알았다. 심 선생은 문화재 감정위원이자 감식안 높은 골동품 상인으로서 정재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주로 거래하는, 이른바 업계의 큰손이었다. 나에게 가업을 물려주신 선친과는 교분이 있었으나, 한갓 피라미에 불과한 나는 일면식만 있을 뿐이었다. 왜 심 선생을 아는지 묻느냐고 묻자 나PD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심 선생이 방송이 나가던 날 저녁에 전화를 해서 말이지, 내가 만든 프로를 재밌게 잘 보고 있다고 엄청 칭찬했어. 다음엔 그 양반을 자문 위원으로 데려다 써야겠어. 네 생각은 어떠냐?"

"그분이 과연 그 얘길 하려고 너한테 전화를 했을까?"

"사실은 승영이 궁금해서 전화를 한 거였어. 칼 주인을 만나고 싶다는 거야."

"칼 주인을? 뭣 땜에? 사려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뻔한 거 아니겠어? 출연자 신상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고 했어. 너 그 칼에 대해 뭐 짚이는 거 없어? 심 선생이 왜 그 칼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런 거물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잖아?"

"짚이는 거? 글쎄?"

정말 글쎄, 였다. 내가 봤을 때 승영은 골동품으로서 그다지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혹시 승영의 가치를 내가 잘못 감정한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심 선생 같은 사람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칼을 먼저 손에 넣어야 했다. 나는 나PD에게 대답했다.

"그 칼은 값어치가 전혀 없어. 그냥 칼날이 없다는 게 좀 특이할 뿐이지. 그나저나 칼 주인이 그거 팔 생각 없다니? 혹시 연락되면 말이라도 건네줘 봐. 가게에 장식품으로 걸어놓으면 손님들 시선은 끌 거 같으니까. 요새 장사가 안 돼도 너무 안 돼."

"그래, 그 칼은 내가 봐도 별 거 없겠더라. 심 선생이 뭐라 하든, 칼 주인이 팔겠다고 하면 너한테 먼저 소개시켜 줄 테니 걱정 말아. 근데 너 돈 좀 있냐?"

만기된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는데 당장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적지 않은 액수였으나, 두 달 후에 적금을 타면 그걸로 갚겠다고 했다.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당장 우리 집 안방으로 이사를 올 기세였다. 인터넷뱅킹으로 그의 통장에 입금을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고맙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진정한 친구, 영원한 우정 같은 말들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전화를 끊고 두어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전세를 옮긴 것이 불과 열 달 전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가 청송을 향하여 부리나케 차를 모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틀 후 방송국 프로그램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PD가 만들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폐지하기로 방금 부서회의에서 결론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전화를 건 담당자가 내게 물었다.

"나PD님 도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회의 결과를 알려드려야 하는데 요즘 통 연락이 안 돼요. 혹시 모르세요?"

모른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녀석이 뭘 하고 있을지 환하게 그려졌다. 칼을 손에 넣는 걸로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심 선생 같은 거물이 나서서 칼을 찾는 이유를 캐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심 선생을 만나고 있으려나? 그가 그동안 얼마나 알아냈을까 궁금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텔레파시도 이런 텔레파시가 없었다. 문자 수신음이 연달아 울려 스마트폰을 열어 보니, 나PD가 보낸 짧은 동영상 세 개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첫 번째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퇴락해가는 시골집 마당을 배경으로 육십이 넘어 보이는 촌부(村夫)가 보였다. 남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이 도둑놈의 자식들!" 이라고 욕을 하며 캠코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욕을 먹고 있는 건 당연히 나PD였다. 그는 남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보였다. 내심 고소했다. 60대 남자가 왜 화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이번엔 다세대 주택가의 좁은 골목이었다.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다지 순진한 인상은 아니었다. 나PD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 이 남자가 승영을 가지고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칼은 원래 남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첫 장면에서 화를 내던 노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아버지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방송에 가지고 나갔을 뿐 아니라 나PD에게 팔기까지 한 것이었다.

"아버님이 그 칼을 누구한테서 사셨는지 혹시 알아요?"

나PD가 남자에게 물었다.

"동네 빈 집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는 할아버지한테 받았대요."

"그 할아버지가 누군데요?"

"타지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요. 살짝 미쳤다는 말도 있구요. 그 할아버지가 옛날에는 S대 의대를 다녔대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미친 거라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그 할아버지가 왜 아버님한테 칼을 주셨어요?"

"평소에 저희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먹을 것도 잘 주시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 할아버지가 폐병에 걸려서요, 저희 아버지가 치료비를 대줬더니, 돈을 그냥은 못 받는다고......"

"그러면서 칼을 아버님한테 드린 거군요?"

"네, 그렇게 된 거죠."

"그 칼이 어떤 칼인지는 알아요?"

"자세한 건 잘 모르구요. 그냥 느낌상 값나가는 칼이구나......"

세 번째 동영상의 배경은 폐가에 가까운 농가였다. 처음에 봤던 60대 남자가 얌전한 촌색시처럼 나PD를 안내하고 있었다. 가끔 나PD와 웃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농부의 태도가 급변한 걸까. 나PD의 사회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농부와 나PD는 찌그러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폐품이나 다름없는 살림살이들이 사방 벽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좁은 방안에는 비쩍 마른 노인이 누워 있었다. 농부가 노인에게 "이보쇼, 나 왔소! 몸은 좀 어떻소?" 하며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기운이 없는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기침을 하는데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아버님, 안녕하세요!"나PD가 캠코더 뒤에서 인사를 했다. 노인은 치아가 몇 개 남지 않아 옴폭 들어간 입술을 벙긋거리며 뭐라고 대답을 했다. 발음이 새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동영상은 여기에서 끝나 있었다. 이 노인이 승영의 원래 주인인 것 같았다. 나는 나PD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면 전세금으로 빌려간 돈 대신 칼을 내 소유로 하겠다고 얘기할 생각이었으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나PD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연락 좀 해. 승영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어.' 중요한 정보 따윈 물론 없었다. 통화라도 한 번 하려면 별 수 없었다.

그날 밤 늦게 전화를 걸어 온 건 나PD가 아니라 뜻밖에도 심욱동 선생이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고, 그는 한껏 느긋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선친이 돌아가신 후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용건을 묻자,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심중을 드러냈다.

"내가 승영을 찾고 있는 건 나PD한테 들어서 알고 있겠지? 지금 자네가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넘기게."

마치 자신의 칼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더라도 선생님께 넘겨야 할 이유가 없고요."

짜증이 묻어 난 내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나PD가 갖고 있는 게 분명하군. 근데 그 사람은 왜 내 전화를 안 받는가?"

"나PD는 원래 바쁠 땐 전화를 잘 안 받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승영은 내 오랜 고객이 원래 주인일세. 사십 년 전에 도난을 당했으니 현재는 장물인 셈이지. 내 고객은 혹시라도 승영이 시중에 나오면 수집해달라고 아주 오래 전부터 부탁을 해오고 있었어. 나PD가 승영을 가지고 있다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네. 장물을 가지고 있어봐야 이로울 게 없잖은가. 그냥 달라는 건 아닐세. 사례는 후하게 하겠네. 그러니 나PD와 연락되면 내 말을 꼭 전하게. 그리고 내 고객은 시간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꼭 전하고. 알겠나?"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협박이 깔려 있는 심선생의 강압적인 말투가 몹시 불쾌했다. 나는 승영의 원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도난을 당했다면 경찰에 신고는 한 걸까? 문화재도 아닌 물건을 심 선생 같은 사람까지 동원해서 찾는 이유가 뭘까? 그것도 사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의혹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도검류(刀劍類)와 금속류(金屬類)에 관심이 많은 선배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선배가 승영에 대해 비교적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선배의 설명에 의하면, 도검(刀劍) 제작으로 유명한 중국 저장성의 한 도검 장인(匠人)이 공주(孔周)가 가지고 있었다는 칼날 없는 칼, 승영을 만들었다고 했다. 만주사변 직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던 때였다. 시대가 그랬으니 장인이 칼을 만든 뜻은 짐작이 갔다. 승영은 가지고만 있어도 천하를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배는 승영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꽤 오래 전에 들었다고 했다. 그 당시 신흥 재벌 중 한 사람이 수집했는데, 그 이후에는 승영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선배는 나PD 방송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신흥 재벌이 심선생의 고객이라고 가정한다면, 폐가에 혼자 사는 노인이 심 선생의 고객한테서 칼을 훔쳤다는 얘기가 된다. 그 연결고리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다른 선배 한 사람은 십여 년 전에 승영을 찾는 심 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나한테만 연락한 게 아니고 심 선생이 이쪽 계통에 아는 사람들한테는 죄다 연락을 넣었었어. 그 당시 업자들 사이에 승영만 찾으면 아파트 한 채 떨어진다는 말이 유행 할 정도였지."

"승영을 찾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죠?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있으세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당시에 한 가지 이상한 건 있었어. 그때 한참 심 선생이 매스컴에 시끄럽게 오르내리고 있을 때였거든. 제일그룹 박 회장 컬렉션 중에 철화백자용문항아리(鐵畵白磁龍紋壺)가 위품(僞品)이라고 심 선생이 감정을 해서 말이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됐었잖아? 심경이 복잡할 텐데 승영 찾을 정신이 어디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무튼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박 회장은 병으로 사망했고, 그러고 또 얼마 안 있다가는 새로 건립된 박 회장 컬렉션 박물관에 고문으로 취임을 했지."

나도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철화백자용문호는 국보급 문화재였다. 박 회장 컬렉션과 비슷한 물건이 그 당시 크리스티 경매에서 112억에 팔리면서 크게 화제가 됐기 때문에, 심 선생의 위품 감정은 신문 지면에 여러 번 오르내렸었다. 선배가 들려준 얘기로 미루어 볼 때, 승영을 찾아달라고 심 선생에게 부탁을 한 사람은 박 회장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 분명했다.

"이건 단순한 절도가 아냐. 살인 사건이야!"

일주일 만에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나PD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그동안 수염조차 깎지 않아 도저히 눈뜨고 봐 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살인 사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름 장마가 시작되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동안 줄곧 전화기가 꺼진 상태였던 그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가게 근처에 있으니 빨리 나와 자기를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가게 문을 닫기 위해 뒷정리를 하던 나는 근처면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 자기를 뒤쫓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무슨 영화 찍냐?"

어이가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안국역 사거리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현대 사옥 뒤쪽 후미진 골목에 있는 조그만 재즈 바 안에 땀내와 쉰내를 풍기며 그가 앉아 있었다. 볼 만한 광경이었다. 덥수룩해진 머리와 수염, 구겨진 티셔츠와 바지, 흙물이 든 운동화.

"무슨 일이야? 정말 킬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거야?"

"나, 이번에는 정말 큰 걸 잡은 거 같아."

그 몰골로 앉아서 그는 대박타령을 했다.

"잘 됐네. 그거 터뜨려서 크게 한 판 뜨면 되겠네."

"이 칼 아무래도 너한테 맡겨야겠어."

그는 내 빈정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자리에 놓여 있는 검정색 스포츠가방을 손으로 건드렸다. 그의 표정은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지, 그 자체였다.

"근데 사안이 너무 미묘해. 아무도 믿지 못할 거야. 나도 처음엔 믿지 못했으니까. 도대체 이 사건을 세상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를 모르겠어."

"널 쫓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 심 선생이야?"

"사십 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은폐하고 싶은 사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설명을 좀 해 봐."

나PD가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고는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화면에는 승영의 원래 주인이었던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몹시 낡은 집을 향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반 농가와는 외양이 사뭇 다르게 생긴 집이었다.

"이 집이 맞아요, 할아버지?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이게 그 별장이에요?"

노인이 나PD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대문 앞에 풀썩 주저앉아 앙상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자물쇠가 걸려 있는 녹슨 철제대문을 비췄다. 노인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나PD의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여기 이 집이 바로 사십년 전 여름,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별장입니다. 노인의 친구였던 박종명 씨 아버지의 소유로, 사냥용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집입니다. 이 노인은 그 당시 이곳에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걸 피하기 위해 세상을 버린 채 한 많은 은둔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분명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고,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화면은 다시 흐느껴 우는 노인을 비추다가 끝이 났다. 나PD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할아버지는 S대 의대를 다녔어. 제일 그룹 박 회장의 셋째 아들 박종명과 동기 동창이었지."

"제일그룹?"

나는 나PD에게 내가 그동안 수소문해서 알아낸 사실들을 전해주었다. 심 선생과 제일그룹 박 회장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도, 박 회장 사후에 건립된 박물관에 심 선생이 고문으로 취임한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얘기를 들은 나PD는 박물관을 건립한 사람이 셋째 아들 박종명이라고 했다. 박종명은 자신의 아버지인 박 회장을 싫어했고, 그래서 심 선생을 고문 자리에 앉히는 일이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나PD는 다른 영상을 찾아 틀어주었다. 이번에는 다시 노인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PD가 차분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승영이라는 그 칼, 어디에서 어떻게 손에 넣게 되신 건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실 수 있죠? 이건 할아버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예요. 평생 이렇게 살아오신 거 억울하시잖아요. 마음 편히 가지고 말씀 해 주세요, 천천히."

화면 가득 잡힌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고독과 고통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참담한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종명이 그놈하고 내가 의과 대학 동창이야. 처음에 의대에 입학해서 예과를 다니던 동안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어. 그놈은 제일그룹이라고 내로라하는 집안 아들이었고, 나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집 장남이었으니까, 서로 부딪칠 일이 없었지. 그런데......"

본과 1학년, 해부학 실습을 하게 되면서 박종명과 지금은 폐가나 다름없는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 되어버린 청년은 같은 조가 되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어야 했던 청년은 많은 공부 양을 감당할 시간이 부족해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 학년을 마치면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할지 고민을 하던 때였다. 청년은 시취(尸臭)와 포르말린 냄새가 뒤섞인 지하 실습실에서 카데바를 해부하는 시간이 좋았다. 사후강직 상태로 딱딱하게 굳은 시신의 배를 갈라 뼈를 부수고, 폐와 간과 심장을 떼어 내고, 메스로 근육 덩어리를 잘라 뼈에서 분리해 내고, 살점을 얇게 저며 구조물을 확인하고 표본을 뜨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청년이 만든 표본은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해부학 교실의 담당 교수 또한, 무어(Moore, 의과대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해부학 교재의 저자)가 왔다가 울고 갈 실력이라며 청년을 칭찬했다. 그러나 같은 조였던 박종명은 자신의 몫을 해내지 못했다. 그는 서투른 메스질로 구조물을 뭉개버리기 일쑤였다. 청년은 그가 해야 할 몫까지 도맡아 해냈다.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저녁, 박종명은 할 말이 있다며 인적 없는 곳으로 청년을 불러냈다. 그는 청년 앞에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는, 이런 부탁하면 안 되는 거 잘 알고 있는데 도저히 청년이 아니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며, 내일 있을 해부학 시험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 써 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는 해부학 교재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구토가 나서 도무지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데 온 얼굴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동안 박종명의 입을 통해 청년이 알게 된 것은, 박이 적성에도 없는 의대를 순전히 자기 아버지의 강압 때문에 지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박종명에게 아버지 박 회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박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내쳐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였다. 박종명은 자신은 재시험을 봐도 낙제를 면치 못할 거라고 했고, 그건 청년이 봐도 그랬다. 박종명이 말했다. 자신의 부탁만 들어준다면 청년이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청년은 재시를 보면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제 발 한 번만 자신을 도와 달라고.

"그렇게 뒷거래가 시작된 거로군!"

인터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내가 던진 말에 나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사건은 어떻게 하다가 일어난 거야?"

내 질문에 나PD가 동영상을 앞뒤로 훑으며 그 대목을 찾아 보여주었다. 노인이 감정이 북받치는지 몹시 흥분한 상태로 더듬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놈들이, 박종명이하고, H하고 두 놈이, 저녁에 시장엘 간다고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왔어. 이름이 정미였어! 김 정미!"

청년과 박종명, 그리고 또 다른 청년 H. 이 세 사람은 여름방학을 맞아 박종명 아버지의 사냥용 별장에 놀러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박종명과 청년 두 사람은 해부학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이후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박종명은 자신이 속해 있던, 소위 있는 집 자제들이 어울리는 클럽에 청년을 데려갔고, 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함께 했다. 청년은 박종명과 어울리면서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 클럽의 아이들은 사치가 일상이었다. 물질의 부족 안에서 힘겹고 겸손하게 현실을 배우고 살아온 노인의 눈에는 공기나 물처럼 부유함이 흘러넘치는 그들의 세상이 낯설기만 했다. 클럽에서 만난 아이들은 행동에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았다. 클럽 안에서의 파트너 교환이나 대마초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다른 사람의 승용차를 부쉈고, 하룻밤 만나 어울려 논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폭행이나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탈행위를 심상한 표정으로 말했고, 듣는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죄의식 같은 것들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다. 청년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질적 사회적 환경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문장을 떠올렸다.

세 사람이 별장으로 놀러간 것은 본과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대학병원에서 하는 임상실습으로 일과표가 채워지면서 청년은 자신의 시험 답안에 박의 이름을 적어 넣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럼에도 청년은 여전히 박에게서 등록금을 받았기 때문에 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일탈의 정도가 심했던 H와 어울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도, 별장으로 함께 여름휴가를 가자는 박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별장의 거실은 여러 자루의 총과 칼로 장식되어 있었다. 총은 자물쇠로 잠긴 유리 장식장 안에 들어 있었으나 칼은 진열대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청년이 칼을 어루만지며 구경하고 있을 때 박종명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검도에 심취했을 때 이 국내외의 보검(寶劍)들을 수집했노라고 청년에게 설명했다. 그러더니 검정색 칼집에 황금빛용이 주조되어 있는 단검 한 자루를 집어 들어 청년에게 건넸다. 한 번 열어 보라는 말에 청년은 비녀장을 풀고 칼집에서 손잡이를 빼냈다. 그리고는 손잡이에 칼날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박 종명은 청년에게서 손잡이를 받아들더니 오른 손의 검지를 펴서 칼등이 있을 곳을 따라 어루만지는 시늉을 했다. 무엇에 홀린 거 같은 목소리로 박종명이 말했다. "이 칼의 이름은 승영이야. 이 칼날 좀 봐. 정말 아름다운 칼이지? 안 그래?" 청년은 박의 농담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칼집과 손잡이에 비녀장을 걸어 원래 있던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오후 읍내 시장엘 다녀오겠다며 나간 박과 H는 한참 만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정미라고 했고, 열일곱이나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평범하고 얌전한 시골 소녀였다. 조부 상을 당한 별장지기를 대신해 집안일을 거들게 하려고 데려온 거 같았다. 정미는 걸레를 찾아 들고 거실의 먼지를 닦은 다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정미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H가 잠시만 있다 가라고 붙잡았다. 한 두 시간만 같이 놀아주다 가면, 하루치 일당을 두 배로 주겠다고 했다. 그 제안에 잠시 망설이던 정미는 거실 한 구석에 얌전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H가 냉장고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꺼내왔다. 그리고 이런 저런 게임을 하며 정미를 지게 만들어 술을 마시게 했다. 박종명은 재미있어 하며 H가 하는 짓을 구경했다. 억지로 한 잔 두 잔 술을 마신 정미가 점점 취해갔다. 그들이 하는 짓에 역겨움을 참지 못한 청년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켜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청년은 눈을 떴다. 불이 꺼져 깜깜한 가운데, 한쪽 방에서 여자아이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청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년을 흔들어 깨운 건 박종명이었다. 그가 청년에게 말했다. 이젠 네 차례야! 네가 일부러 술에 취해 잠든 척 하는 거 다 알아. 일어나. 들어가서 너도 어울려. 우린 친구잖아.

화면 속에서 노인은 자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깊게 팬 얼굴 주름으로 눈물이 흐르며 번져나갔다. 노인은 울면서 웅얼거렸다. "박종명 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아냐, 그 놈 탓이 아냐! 내 탓이야, 내 잘못이야!"

방에서 나온 청년은 독한 술을 들이켜고 술에 취해 또다시 곯아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고, 집안은 고요했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일으키자 구토가 솟구쳤다. 화장실로 뛰어들어 토악질을 하고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수돗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엔 수돗물을 토해냈다. 몇 차례 구토를 한 후 가까스로 속이 진정되자 청년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어젯밤 여자아이를 범하던 방으로 갔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 깨진 유리창, 함부로 내던져져 있는 전화기와 장식품.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뒤덮고 있는 피, 사방 천지에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피비린내에 구토가 치밀어 오른 청년은 허리를 접고 맹물을 토해냈다.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에 승영의 손잡이가 들어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칼집은 저쪽 깨진 유리창 앞에 떨어져 있었다. 칼집을 집어 들었다. 발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혀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피가 누구의 것인지, 왜 피가 방바닥을 적시고 있는지 청년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피를 흘린 사람은 살아있을 못할 거라는 생각만이 청년의 백지처럼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때 집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어느 결에 박종명이 방문 앞에 서서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종명이 소리쳤다. "야, 이 개자식아! 니가 사람이냐?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무자비하게 칼로 찌를 수가 있어? 어? 재미 좀 보고 돌려보내면 될 걸, 왜 사람을 죽이냐고?!" 청년은 박종명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개자식이라고 욕을 먹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박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청년에게 살인자라고, 너 때문에 자신과 H도 곤경에 처했다고, 앞으로 어쩔 거냐고 소리쳤다. 청년은 박종명의 말을 들으며 방안에 쏟아져 나온 피가 여자아이의 것인 줄 알게 됐다. 박종명은 H가 지금 여자아이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 때문에 자신들마저 공범이 되어버렸다고 분노를 쏟아냈다. 청년이 덜덜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이 칼날 없는 칼로 여, 여자애를 죽였다는 거야?" 박종명의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칼날 없는 칼이라고? 네 놈 눈엔 이 칼날이 안 보인다는 거야?" 박이 청년에게 달려들더니 칼의 손잡이를 빼앗아들었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아니 존재하지 않는 칼날로 자신의 손등을 힘껏 그었다. 그의 손등에서 새빨갛게 피가 배어나왔다. 청년은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청년이 다시 물었다. "내, 내가 뭘 잘못해서 나한테 이런 누명을 씌우는 거지? 이, 이젠, 내가 필요 없어져서 이러는 거니? 난 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도 찌, 찌르지 않았어." 박종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대답 대신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휴지를 뽑아 피가 흐르는 손등을 감쌌다.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칼을 집어 들고는 칼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힘껏 감싸 쥐었다. "나, 나는 이 칼날이 안 보이는데, 네 눈에는, 이게 보인다고? 내가 이 칼로 여자애를 주, 죽였다고?" 청년이 중얼거리며 다가가자 박종명이 고개를 들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박의 눈에 공포가 떠오르는 순간, 청년은 박의 늑골과 늑골 사이에 있는 힘을 다해 칼날을 밀어 넣었다. 칼날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청년에게 그건 그저 시늉에 불과했다. 박이 성마르게 비명을 지르며 청년을 밀쳐냈다. 청년은 온 몸을 떨며 박종명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길 기대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칼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불가사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동영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거야, 없었다는 거야?"

내가 묻자, 나PD는 한 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살인사건이 있었는지 조사를 해 봐야지. 그 당시 실종자 중에 정말 김정미라는 여자애가 있는지."

"넌 이 노인 얘기가 믿어져? 칼날 없는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그리고 또 박종명 손등에서는 피가 났는데 노인이 박종명을 찔렀을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박종명은 어떻게 멀쩡한 거지?"

"그게 그러니까......"

나PD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의 뒷말이 궁금했다.

"......이 사건의 핵심이야. 믿어지진 않겠지만 전도유망한 의과대학생이 은둔자가 되어 한 평생을 숨어 사는데, 할아버지 말이 거짓일 리가 없잖아. 조사해서 진실을 가려야 해."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노인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로도 그의 현실감각을 되돌릴 수 없을 거 같았다.

"조심해.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에서 누가 내 차를 자꾸 뒤따라오는 거 같았어. 시내로 들어오면서 따돌리긴 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나에게 승영이 들어있는 검정색 스포츠 가방을 넘겨 준 나PD는 술집 주차장에서 자기 타에 올라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세금 대신 칼을 내 소유로 하자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와 헤어져 가게로 돌아왔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던 승영을 가방에서 꺼내 선물 상자에 넣고 한지로 포장했다. 그리고는 진열장 안 다른 상자들 사이에 넣어두었다. 누가 봐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는 싸구려 기념품 선물 포장처럼 보였다.

다음 날도 장마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가게 문을 닫기 위해 뒷정리를 하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PD인가 싶어 재빨리 액정화면을 보니 놀랍게도 심욱동 선생이었다. 나는 긴장을 억누르며 되도록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심 선생의 말투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나PD의 행방을 묻는 그에게 나는 나PD와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내가 어젯밤 계동 뒷골목 재즈 바에서 나PD를 만나 검정색 스포츠 가방을 넘겨받은 사실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가게로 찾아 갈 테니 칼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했다. 나는 나PD와 내가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넘길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면서, 그 칼이 오래 전 일어난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심 선생은 잠시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여유를 잃지 않은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답답한 친구야!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자넨 칼날 없는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지금 제 정신인가? 그런 말을 세상 누구한테 꺼낼 텐가? 그래봐야 자네하고 나PD만 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자네는 오랫동안 산속에서 혼자 살아 온 노인네 정신이 온전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 노인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만에 하나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치세. 그 사건에 증인이나 증거라도 있나? 뭘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증명할 텐가? 또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몇 년인지는 아나? 이것 보게. 난 지금 나PD와 자네가 술수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네."

"술수라니요?"

"그렇게 해서 물건 값을 올리려는 심산이겠지."

"그런 식으로 절 모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 칼은 제 게 아닙니다. 나PD 칼입니다. 제 맘대로 넘겨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자네가 정말로 친구를 위한다면 그 칼을 나에게 넘겨야 하네."

"그건 또 무슨 궤변이십니까?"

"나PD는 지금 제 정신이 아냐.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한테 홀려 있다고."

"그래서요?"

"나PD가 지상파 방송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네. 그리고 자네와 나PD 두 사람 다, 십 년 쯤 일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 보상을 하겠네. 지금 이 제안은 오늘 밤 열두시까지만 유효하네."

갑자기 맥이 풀리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음을 뒤흔드는 제안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PD 괜한 고집에 휘둘리지 말고 현명하게 판단하게. 어차피 나PD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벽에 부딪치게 되어 있어. 시쳇말로 나PD가 한 방 터뜨린다고 가정해 보세. 세상이 잠깐 시끄러워지는 거 말고 뭐가 더 있지? 괜한 구설수 만들어봐야 자네와 나PD한테 이익 될 게 없어. 내 생각은 그런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심 선생이 하는 말은 구구절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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