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버리고 산속으로 들었던 도연명도 쉬어갈 작은 무릉도원

▲ 운곡서원에서 계곡 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용추대 위에 세워진 유연정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왕신저수지를 푯대삼아 간다. 포항에서 강동을 거쳐 경주 보문단지로 가는 길이다. 먹방여행을 즐기는 분이라면 화산불고기 단지로 들어가는 길로 이해하면 좋겠다. 가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길이지만 고운 자태가 겨울이라고 마냥 흉하지는 않다. 산천이 스산하게 채색됐지만 사방이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득한 정취가 오히려 정겹다.

왕신저수지에 다다르면 다리 못 미쳐 왼쪽으로 꺾어든다. 용추계곡이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올라간 계곡.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대한민국의 그럴듯한 계곡이나 폭포 연못에 흔히 붙어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조선의, 대한민국의 장삼이사가 자신의 후손들이 궁박하고 한미한 시골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큰 인물로 거듭나달라는 절절한 여망이 담겨있다.

계곡을 끼고 조금만 들어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오래된 한옥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운곡서원이다. 운곡서원은 세상이 지금처럼 빛의 속도로 빨라지기 전 포항 인근에서 매화를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탐매명소다. 이제 막 새싹이 언땅을 뚫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 쯤 희고 붉은 꽃잎을 피우며 특유의 향으로 탐매꾼을 자극하던 매화.

유연정은 운곡서원의 부속건물로 서원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져 있다. 유연정은 저물어가는 가을에 딱 어울리는 정자다. 이름에서 부터 가을 냄새를 푹푹 풍긴다. 유연정 앞 350년 묵은 은행나무가 낙엽비 떨어뜨리는 가을이 압권이다.

정자이름은 도연명의 시 '음주'에서 따왔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 아득히 남산을 바라본다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오상고절', 사군자의 가을 담당인 국화는 오만한 자태로 서리를 제몸에 받아들이고 그 시련을 견디며 꼿꼿히 절개를 펼쳐 선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화차는 서리가 내린 뒤이어야 맛이 깊어지는데 도연명은 국화를 차로 만들기 위해 울타리에서 꽃을 따던 중 고개를 돌려 아득히 먼 남산을 보며 노래했고 한반도의 동쪽 깊숙한 곳에 정자를 지은 선비가 그 시를 따 정자 이름을 유연정으로 했다. 이런 까닭으로 경주의 한미한 계곡에 들어앉은 정자에서 도연명을 만난다.

이 싯구는 옛어른들이 편지를 쓸때 정형화한 문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가을에 편지를 쓸 때는 꼭 '채국동리하지절'로 시작했다. 그리하면 도연명이 '음주'에서 폭발시켰던 그 서정이 편지에 그대로 전해진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 정도로 이 싯구가 조선선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겸재 정선도 그의 두 폭 부채그림에 '채국동리' 와 '유연견남산'을 각각 인용해 화제로 썼다.

도연명은 조선 벼슬아치들의 이상향이었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가장 많이 제작 주문받은 인물화가 도연명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쌀 닷말 타 먹자고 머저리 같은 자식들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며 작은 벼슬 자리를 내 던진 뒤 '나돌아가리 나 돌아가리' '귀거래사' 부르며 시골로 돌아간 도연명의 기개가 그들에게는 로망이었을 것이다.

유연정은 도연명이 국화를 따며 남산을 바라보던 그 가을을 마음에 담고 지은 이름이다. 멀리 남산은 보이지 않지만 정자 앞 개울은 물이 철철 넘쳐 흐르고 숲은 깊고 아늑하다. 정자 앞에는 대나무숲으로 산을 가려 간혹 바람이 불 때는 가까운 바다의 파도소리가 밀려오는 듯도 하고 별안간 내리는 소나기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니 오묘하다.

유연정은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건립됐다. 용추계곡의 용추대 위에 세워졌다. 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태사 권행과 그의 후손 권산해 권덕린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했다. 정면 3칸, 측면 2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좌측칸을 통칸의 우물마루로 꾸몄다. 마루 전칸면에는 헌함(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을 두었고 대청에는 골판문을 달았으며 얕은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특이하게, 대청의 대들보 위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반자 양측에 각재를 내린 후 반원형의 판재를 45도로 끼웠다. 1800년대 초기의 건축수법을 잘 나타낸다.

▲ 유연정 현판.


□ 유연정의 명물 압각수

유연정의 명물은 은행나무다. 나뭇잎이 오리발을 닮았고 가지가 오리 다리와 비슷하게 생겨 압각수라고 한다. 서원이나 정자에는 어김없이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서 있게 마련인데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고 공자의 교탁이 은행나무로 만들어져 그렇다는 설도 전한다. 중국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 앞에 행단은 이런 뜻으로 세워졌고 경주 양동마을에 은행나무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행나무는 가을에 수많은 인파를 불러들인다. 11월 중순이면 아마추어 사진 동호회나 여행 동호회에서 버스를 대절해 몰려들어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룬다. 가을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원과 정자는 울긋불긋 단풍 물결에 파묻히는데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한 가운데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뚝 서 노란 낙엽비를 쏟아내며 장관을 이룬다.

유연정 앞의 은행나무는 영주 순흥압각수가 조상이다. 순흥 객사 뜰에 압각수가 있었는데 1452년(단종 1년)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때 점쟁이가 말하기를 '압각수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마을은 복향될 것이다'고 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나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조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돼 반역죄로 처형했다. 순흥은 폐향되고 풍기군의 속현이 되고 말았다. 240여년이 지난 숙종때 말라죽은 압각수에 생기가 돌고 나무가 살아나서 큰 숲을 이뤘다. 그 후 순흥은 복향되고 2년 뒤에 단종의 왕호도 회복됐다. 사육신도 복권됐고 압각수 아래 금성단을 창설하였다.
▲ 유연정 앞 350년 묵은 은행나무. 가을이면 낙엽비를 즐기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야기는 경주의 운곡서원과 유연정으로 돌아온다. 이 서원과 정자는 권산해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죽림 권산해(1403~1456)는 조선시대 종부사첨정으로 있다가 단종이 귀양을 가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세조가 몇 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 나자 이 일에 연루돼 투신 자살했다.

권종락은 단종때 죽은 충신들이 모두 복권되고 증직이 됐지만 유독 자신의 12대조인 권산해만 누락된 것을 억울하게 여겨 정조 13년에 정조가 거동할 때 임금의 수레 아래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다. 권산해는 복직되고 금성단에 배향됐다. 권종락은 서울서 돌아오는 길에 순흥 금성단에 들러 압각수 가지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나무가 지금의 은행나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