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이군’ 고려 흥위위 보승낭장 장표…이성계 피해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초곡서 '두문불출'

▲ 태종 8년(1409)에 건립된 포항 초곡리 칠인정은 과거에 급제한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인동장씨 흥해파의 파조 장표의 회갑을 기념해 지은 정자로 유명하다.

'포항의 두문동'을 찾아간다.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흥해로 가다가 포항역 입구를 지나면 선린대학 쪽으로 꺾는다.

선린대학과 파라다이스 온천을 지나 차 한대 겨우 지나가는 시골길을 한참 가면 막다른 길에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 '포항의 두문동'이라 불리는 '칠인정(七印亭)'이 나온다.

두문동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만든 마을이다. 집속에 박혀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이라고 하는데 두문동에서 비롯됐다.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는 인동 장(張)씨의 600년 된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장표. 고려시대에 흥위위 보승낭장을 지냈다. 흥위위는 중앙군인 이군육위 중 3번째 군단이다.

전체 병력은 보승 7령 정용 5령 도합 12령에 1만2천여명 정도됐다고 한다. 낭장은 정6품 무관직으로 휘하에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중간 간부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자 장표는 '이군불사'를 외치며 고향인 인동(현재의 구미)로 향한다. 그러나 새 정권의 호출이 계속되자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음산 아래 초곡까지 와 초막을 짓고 은거하며 인동장씨 흥해파의 파조가 됐다. 그리해 초곡은 '포항의 두문동'이 됐다.

장표는 슬하에 4남 3녀, 7남매를 뒀는데 자신은 고려에 벼슬을 한 사람으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은거했으나 자식들까지 출사를 금할 수는 없다며 벼슬길을 열어놓았다. 네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맏아들 을제는 봉화현감을, 둘째 아들 운봉현감, 셋째 아들 을해는 중림수, 넷째 아들 을포는 청하현감을 지냈으며 유정봉 이읍 이현실 등 세 명의 사위도 봉상소윤과 주부령 동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

요즘말로 하면 고시 패스한 7남매가 아버지 장표의 회갑을 기념해 정자를 짓기로 했다. 정자 앞에 두 그루의 기이한 형상의 느티나무(쌍괴수)를 심고 그 나무에 자신의 인수(조선시대 병권을 가진 관원이 병부 주머니를 찰 때 쓰던 사슴가죽으로 된 끈)를 걸었다. 7개의 도장, 칠인정이다.

정자가 세워진 지 370년이 지난 가을 어느 날에 엄청난 규모의 태풍이 휘몰아쳤다. 마을이 모두 태풍에 휩쓸려 갔고 정자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쌍괴수마저 바람에 꺾어지고 뽑혔다.

현재의 정자는 장표의 13세손 호와 순이 기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다가 죽고 기와 윤, 용이 완성했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후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에 마루를 두었다. 앞과 양쪽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정자와 마주서서 보면 왼쪽의 작은 방은 '효우재' 오른쪽 큰방은 '경수당'이다.

건물은 구릉 위에 지어져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했으며 정자는 누각 형태로 건축됐다. 아래층에는 양쪽 방에 불을 지피는 함실을 마련했고, 나머지 공간은 개방됐다.

자연석으로 쌓은 외벌대 기단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층에는 두리기둥을, 2층에는 대청의 오른쪽 기둥 2본중 앞쪽은 팔각기둥으로, 뒤쪽은 네모기둥으로 세웠다.

나머지는 두리기둥으로 설치했다. 온돌방 전면에는 양쪽 여닫이 세살문을, 측면에는 외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왼쪽 방과 대청 사이에는 외짝 들어 열 개문과 외짝 여닫이 문이 있고 오른쪽 방과 대청 사이에는 2분합문과 외짝 들어열개문이 설치돼 있다. 정자내부에는 '칠인정기', '칠인정중수기' 등이 걸려 있다.

정자에 올라 15세기 조선의 선비가 돼 음풍농월해본다. 정자 앞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엎드려 바람을 막아 주고 구릉 앞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계곡의 이름은 쌍계다. 두 줄기의 물이 정자 바로 앞에서 합쳐 내려 간다. 두 줄기 중 위쪽의 계곡에서는 깨끗한 물이 쏟아져내린다.

된장담는 물로 쓰면 된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아낙네들이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에 윤기가 도는 약수다. 다른 한 줄기 계곡에서 나오는 물은 음용할 수 없는 정도의 탁류다.

발씻기 딱 좋은 물이다. 굴원의 시 '어부사'를 읊조려 본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 정자 앞 쌍계수를 끌어다 만든 연못 '소담축'.
정자 앞에서 만난 쌍계수를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소담축'이다.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석축을 쌓고 물고기를 길렀다. '관어(觀魚)'는 은둔하는 선비의 즐거움이다.

무리지어 헤엄치는 물고기의 유영을 안분지족 무애 또는 원천적인 즐거움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관어'는 곧 '지어락'의 경지로 이어진다.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말하니 혜자가 이르기를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라고 반문했고 장자는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 하는가"라고 응수했다.

정자 앞에서 두 줄기 물이 만나 길게 성곡리까지 흘러간다. 경치가 좋은 9개 굽이를 구곡으로 정하고 9개 굽이마다 이름을 붙여 '쌍계구곡'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 그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구곡'은 본래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비롯됐다.

주자가 고향인 무이산에 들어가 경치가 뛰어난 아홉굽이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구곡가 쓴 이후 이에 영향을 받은 이황이 '도산구곡'을 경영하면 '도산구곡가'를 짓고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정자와 구곡은 조선 선비의 유가적 이상향에 도가적 신비주의를 품고 확산됐다. 경북에도 포항의 용계구곡, 안강의 옥산구곡, 김천의 무흘구곡 등이 있으나 '쌍계구곡'은 전혀 알려지지 않아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복원하면 폭발적으로 도시화 되고 있는 흥해지역의 시민휴식공간, 관광상품으로도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 앞에 서 있는 쌍괴수는 450년된 느티나무다. 정자 건축 당시 심었던 쌍괴수가 태풍에 휩쓸려 고사하면서 다시 심은 나무다. 두 그루가 한 몸인 듯 하늘을 찌르며 뻗어올라갔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시절이 하수상할 때 마다 긴 울음을 내뱉었으나 최근들어 마을 근처가 급속히 개발되면서 울음을 멈췄다고 한다. 초목의 신령스런 힘도 개발의 속도, 현대화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 사일마을 초입의 마을 숲.


■초곡리와 사일마을

초곡은 인동장씨 흥해파의 파조이며 이 마을 입향조인 장표가 초막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았으므로 초막골, 초곡이라 불렀다.

그는 고려의 젊은 장수였으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첩첩산중, 벽지에 엎드려 궁벽한 삶을 살았다. 장씨 후손들은 이 때문에 입향조를 초막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곡리를 사일마을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 골짜기가 안전한 은거지였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이 마을 앞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 숲 때문에 마을이 보이지 않아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 '사일(士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이 마을 출신 인동장씨를 흥해파 사일문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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