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동해안 1천리를 가다] 110년 동안 동해 오가는 선박 안전 지킨 숭고한 빛

▲ 1906년 3원 26일 지어진 울기등대 현관 입구 상부에는 태극문양이 남아있다.
신라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었던 울산항(개운포)은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로 온 처용을 비롯한 수많은 아라비아인들과 문명 교류를 통해 천년 신라 문화 발전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 울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자락에 근대 110년의 세월 동안 동해를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지켜온 울기등대가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울산박물관 전시물에는 울기등대를 울산 최초의 등대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무게는 울산 최초의 등대 차원을 넘어선 1906년 3월 점등된 동해안 최초의 등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인천 팔미도등대(1903년 6월 점등)과 비교해도 불과 2년 9개월 차이이다. 이런 역사적 무게 때문에 국립수산과학원에서는 울기등대를 기준으로 동해의 남쪽 경계를 정한바 있으며, 1961년 시작된 동해 정선해양관측라인 중 한 개 라인은 울기등대를 기준으로 시행하고 있다.

3월 26일이면 점등 110주년을 맞이하는 울기등대의 역사는 사실 1905년 2월 20일 일본 해군에 의해 설치된 등간(나무로 길쭉하게 만든 기둥 형태)에서 시작된다.

울기등대터는 원래 말을 기르던 목장터였다.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이 발발하고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한반도의 동해안으로 진출하자 일본은 동해 해상권 장악을 목적으로 울기를 비롯한 곳곳에 목재 등간을 설치하고 또한 등대터 중심으로 일본 해군을 주둔시켰다.

원래 울기등대터에는 나무가 없었지만 군대 위치를 숨길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을 조성했다. 울산목장 혹은 방어진목장으로 불렸던 이곳의 지명 또한 일본은 울기(蔚崎)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제주대학교 주강현 석좌교수에 따르면 기(崎)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미야자키(宮崎)처럼 우리식의 곶(串)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 울기등대 전경.

즉, 울기(蔚崎)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이 일본식으로 지은 명칭이다. 이 명칭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일재문화잔재 시민제안 공모에서 변경의견이 대두되면서 '울산의 기운'이라는 뜻인 울기(蔚氣)로 변경됐다.

러일전쟁 과정에 급하게 설치된 기존에 나무로 세워진 등간은 대한제국에 의해 콘크리트 8각형 등대의 형태로 교체, 1906년 3월 첫 점등됐다. 등대 첫 점등일을 두고 박물관이나 등대자료에는 3월 24일 혹은 26일로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울기등대가 처음 지어진 것은 일본에 의해서 1905년 2월 20일 등간으로 시작됐다. 일본은 을사늑약 후 1906년 3월 등대업무를 대한제국으로 이관했다.

대한제국은 해관등대국을 세관공사부 등대국으로 관제을 개편하고 러일전쟁 준비를 위해 급하게 지어진 등대를 5개년사업으로 고쳐짓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제국 관보 '관세국 고시 113호'에는 '한국 동해안 경상남도 울산항 동측반도의 남단 울기에 건설한 등대에서 매일 밤 일몰부터 일출까지 점등함. 단, 전에 있던 등간은 25일을 한하여 철거함. 등탑은 콘크리트 8각형이며 흰색으로 칠하고 높이는 기초부터 등화까지 20척이다. 등화는 제6등 백색등이며 매 10초마다 불빛을 번쩍이고 18해리까지 볼 수 있다'고 고시했다.

이것을 유추해보면 25일까지는 등간, 26일부터는 등대로 사용됐는 듯 하다. 정확한 점등일 통일이 필요할 듯하다.

이후 일본 해군에 의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수목이 우거져 등대가 잘 드러나지 않자 1987년 12월 새로이 건립된 신등대와 함께 서 있는 울기 구등대의 역사이다.

구등대는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기법 등을 알아볼 수 있는 근대문화재로써의 가치가 높아 2004년 9월 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다.

구등대는 1956년과 1972년에 개량 혹은 증축돼 현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등대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8각형 평면의 등탑에 1층 등탑 앞 포치(porch,현관)형태는 양측에 사각형 기둥을 두고 위로 반원형의 볼트를 올린 배럴볼트(barrel vault) 형식으로 웅장함을 더했다.

등탑 입구 현관 상단 중앙에 한국의 상징인 태극 문양이 자리 잡고 있다. 건축 당시 일본의 상징인 벚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해방 후 태극 문양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런 문양은 인근 호미곶 등대에서도 나타난다. 1908년에 지어진 호미곶 등대에는 조선의 상징인 오얏꽃(자두, 이화)문양이 남아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벚꽃 문양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국립등대박물관 측은 "경복궁 등에 남아있는 왕실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라고 밝혔다.

1987년 12월 새로이 신축된 신등대는 높이 24m 규모의 백색 8각 철근콘크리트 등대이다. 울기등대에서 내뿜는 불빛의 광달거리(등화가 도달하는 최대거리)는 26해리(약 48.15㎞)에 이른다. 울기등대는 10초마다 한번씩 등화를 발사한다. 안개가 자욱한 날은 '뿌우'하는 음향신호로써 등대의 존재를 알린다. 등대의 색깔 또한 하나의 신호 역할을 한다. 먼 거리에서 식별이 필요한 유인등대나 산 위에 설치된 무인등대는 백색등을 사용한다.

방파제 등대는 입항할 때를 기준으로 왼쪽은 녹색등(등대는 흰색) 오른쪽은 언제나 적색등으로 표시해 항구로 진입하는 선박이 좌우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신호를 역할을 해준다.

울기등대는 신등대와 함께 구등대가 자리 잡고 있어 근대와 현대가 서로 조화롭게 마주보면서 등대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울기등대는 동해안 최초로 점등된 등대로써 구등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등대의 역사 학습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울기등대 앞 바다에는 신라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대왕암이 자리 잡고 있다. 경북 양북면의 문무대왕암과 비슷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설화에서는 문무대왕이 죽어 감포 문무대왕암이 산골 된 후 왕비 역시 호국룡이 돼 울산 바다 대암 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곳 역시 대왕암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 울기등대 내 2층으로 연결된 아름다운 계단. 김윤배 박사가 계단 내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사실 신라시대 개운포로 불렸던 울산항은 신라의 최대 국제 무역항이었다. 이 개운포를 통해 수많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와 문물을 교환함으로서 신라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신라 원성왕으로 능으로 추정되는 괘릉의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 울산의 처용암 설화 그리고 코발트색 띠가 아름다운 황남대총 유리그릇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와 교역한 서역인의 흔적들이다.

신라시대 서역인이 지나간 자리에 울산은 동해안의 고래, 정어리, 청어 등 풍부한 수산 자원을 바탕으로 어업전진기지로서 근대를 맞이했다.

1883년 재조선일본인민통상장정이 체결되면서 조선 연안에 대한 일본인의 출어가 허용되자 일본은 일본 연안의 어자원 고갈, 일본 어촌 인구의 포화상태 해결 등을 목적으로 적극적 조선 진출을 권장, 1910년 우리나라에 출어한 일본의 어업선수는 6천척, 어민은 2만 수천에 달할 정도였다.

방어의 산지라는 의미로 원래 방어진이라 불릴 만큼 방어를 비롯한 삼치, 고등어 등 일본 어민이 선호하는 어종이 풍부한 어장이라는 이점 때문에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방어진을 어업근거지로 삼았다.

방어진은 1909년 일본 지방 정부의 보조를 받아 후쿠오카현 어부들이 이주 가옥을 건설하면서 이주어촌으로 출발했다. 울기 구등대는 일제 강점기때 방어진 주변을 오가는 600~700여척의 어선에 3~4천명의 어부들의 뱃길을 비췄다.

울기등대 남동쪽 약 53㎞ 해상에는 한국석유공사에서 2004년 7월부터 천연가스 및 원유 생산을 개시한 '동해-1 가스전' 해상 플랫폼이 자리 잡고 있다.

하루 평균 생산량은 천연가스가 5천만 입방피트(하루에 34만 가구 공급가능), 원유 1천배럴 (하루에 자동차 2만대 운행가능) 정도이다. 가스전 플랫폼은 수심 152m에 위치하며 구조물 총 높이는 200m 규모이다.

'동해-1가스전'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는 세계 95번째 산유국이 됐으며, 우리의 시추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동해-1 가스전' 외에 인근 해상에 '동해-2 가스전'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산유국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동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동해가 품고 있는 해양자원에 있다. '동해-1 가스전'은 그 무궁한 동해의 해양자원 중에 일부일 뿐이다.

울기등대는 울산 최초의 등대라는 의미를 넘어선 동해안 110년의 뱃길을 지켜온 동해안 최초의 등대로써 그 역사적 의미가 풍부하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안내하는 불빛으로 비록 그 역사를 시작했지만, 동해안 최초의 등대로써 110년의 역사의 이어오며 동해안을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지켜왔다.

또한 울기등대가 안내하는 울산항은 신라시대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써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명이 만났던 역사적 장소이다. 울기등대는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기법 등을 알아 볼 수 있는 근대문화재로써도 가치가 높다. 등대를 활용한 다양한 해양문화 콘텐츠를 개발해 해양문화관광 명소로써 꾸준한 발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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