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경주초등학교 교사

서천 강변에 억새밭이 만들어졌다. 올 가을이면 경주 형산강변은 억새꽃 물결을 이루리라. 이른 봄 꽃샘추위 속에 모내기를 하듯 풀뿌리를 옮겨 심어놓았는데, 아직 철이 일러 이제 겨우 해묵은 풀대 사이로 파란 새순이 나오고 있다.

푸르게 변한 모습에 모두가 억새풀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서보니 다른 풀들이 그 사이에서 바쁘게 자라고 있다. 억새풀이 쑥쑥 자라 키를 덮기 전에 저 풀들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길 것이다. 명아주, 닭의장풀, 냉이꽃, 유채꽃까지 얼굴도 다양하다. 누가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다들 살아가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정겹고 아름답다.

가만히 둘러보면 우리네 사는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풀꽃처럼 변방에서 소리 없이 살다 가는 이가 더 많다. 모두가 저마다 제 안에 작은 우주를 갖고 있고, 마음의 축이 있어 나름대로 생애를 꾸려 열심히 살다 간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듯이 모두가 귀한 존재다.

강변으로 내려서려는데 누군가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길바닥에 대문짝만하게 적어놓았다. 처음 보름달을 보며 떠올린 얼굴! 보고 싶고 한없이 그리운 얼굴! 멀리 있어 잡을 수 없는 걸까? 수줍어서 고백하지 못한 걸까? 정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이 길로 접어든다면 수줍은 듯 대범한 그 고백에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까?

억새밭 사이로 길이 열려 있다. 억새꽃 물결을 이루는 가을이 오면 그 연인들도 이 길을 함께 다정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흙길이 맨발이 아니라도 감촉이 한결 부드럽다. 나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는 안온함이 전해진다. 완벽한 사람보다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훨씬 인간다워 보이듯이 잘 포장된 직선의 길보다 풀냄새 나는 흙길이 더 좋다.

지름길보다는 둘러가는 길이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내 안에도 공터가 있다면 풀이 무성하게 못 본 척 내버려두고 싶다. 조금만 일찍 집을 나서면 이렇게 느긋한 출근길이 되는 것을 늘 동동거리며 시간이 빠듯하게 움직였다. 이젠 해도 길어졌으니 일찍 집을 나서 풀꽃 향기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흰 새가 선회비행을 하고 있다. 가끔은 저렇게 먹이 앞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살던 곳을 벗어나 있던 자리를 돌아보면 무엇이 어긋났는지 환히 보일 것이다. 억새밭 길을 걸으며 서걱거리며 날을 세우던 날들을, 상처를 주고받았던 날들을 떠올린다.

가슴 설레던 첫 만남처럼 소중하게 다치지 않게 보듬어주겠다고 했던 언약들이 강가에 돌멩이들처럼 나뒹굴고 있다. 못난 돌들도 하나하나 쌓아올리면 돌탑이 되듯이, 둘이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어 본다. 가깝다고 함부로 한 적은 없는지 소홀함은 없었는지 뒤돌아본다.

이제 그만 출근을 서두르라는 듯 억새밭 길이 끝났다. 남은 길은 강으로 열린 길과, 또 한쪽은 없는 길을 더듬어 강둑으로 올라서는 길이다.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으니 풀 이슬에 신발을 적시며 길을 열어야 한다.

누군가 둑에 호박구덩이를 만들어놓았는데 거름을 실하게 넣었는지 떡잎 두 장이 싱싱하다. 그 옆에 애기똥풀꽃이 노르땡땡한 얼굴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전부를 주려는 듯 꽃은 씨앗을 맺는 순간부터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강물은 쉼 없이 흘러가고 풀은 저 강변이 제 집인 줄 알고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큰물이 지나가면 쓸려버릴 지도 모를 그 곳에 바람을 타고 왔을까? 묻어둔 그리움처럼 흙 속에 숨어있다 얼굴을 내민 걸까? 우리네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 때로는 있던 자리에서 뽑혀지기도 한다.

갈아엎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나 그리움이 사람을 한 곳에 뿌리내리게 하듯이 방금 지나온 저 길가에 무수히 피어난 풀꽃들도 살아온 내력이 있을 것이다. 생득적인 그리움이든 살면서 터득한 것이든 다들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아침이다. 싱그러운 아침이 하루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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