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무엇이 생각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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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호미곶 상생의 손과 '없는 것 빼고는 다있다'는 죽도시장을 필두로 맛있는 구룡포 대게와 과메기, 그리고 내연산 보경사와 운제산 오어사가 이어진다. 포항 경제의 거목이자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포스코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이 정도면 대략 포항의 내로라는 여행지는 거의 둘러본 것 같다. 여기에 구룡포에 있는 근대역사관을 더해보자.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에는"여명의 눈동자"촬영지“로 유명하며 100여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져 있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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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1883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통산장정' 이후 일본인이 조선으로 와서 살았던 곳으로 '일본인 가옥 거리'로 가옥 몇채만 남아 있던 곳을 포항시가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조성한 곳이다.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입성한 것은 100여년 전 쯤으로 알려진다. 가가와현(香川縣)의 고깃배들이 물고기떼를 좇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 이후 많은 일본의 어부들이 구룡포로 이주했다. 1932년에는 그 수가 300가구에 달했다니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가가와현의 어부들이 처음 한반도 해역에 나타난 것은 1880년~1884년 경으로 알려진다. 당시 가가와현의 세토내해는 어장이 좁아 어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힘없는 어부들은 더 넓은 어장을 찾아 먼 바다로 나섰고 풍부한 어족자원을 품은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기가 풍부하니 돈이 모일 수 밖에 없었을 터다. 선박경영과 선박운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으로 부유해진 일본인들은 집을 지었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음식점, 제과점, 술집, 백화점, 여관 등이 들어선 거리는 날로 번창했고 구룡포 최대 번화가로 성장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들로 당시 구룡포의 부흥기를 엿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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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한국의 역사를 뒤틀리게한 일제강점 때문이다. 포항 뿐 아니라 부산이나 통영 등 남해의 바닷가 마을에선 일본식 가옥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사라지면서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까지 일제강점기는 지속된다. 일본인 어부들이 구룡포에 들어선 시기와 맞물린다.

지금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을 보면서 당시 구룡포의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패전 후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거리는 이곳에 존재했던 '사람'과 '시간'을 여전히 기억해낸다.
100년 전의 시간을 오롯이 품은 이 거리를 걸으며 우리 조상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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