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티 없이 살라하네

▲ 나옹선사가 출가하면서 꽂은 소나무 지팡이가 반송(소나무)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창수면 신기리에 자리한 반송정이 싱그러운 초록과 어우러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20살의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사람은 왜 죽는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이 깊은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청년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 산천을 헤맸다. 마침내 문경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선사를 만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중이 된 그는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수행에 수행을 거듭했다. 원나라에 구도유학을 떠나 인도승 지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용맹정진을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 선계의 거목이 됐다. 그가 지공 무학과 함께 3대화상으로 꼽히는 나옹화상이다.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은 그의 제자다.

나옹화상의 이름은 혜근이다. 성은 아(牙)씨. 선관서령 벼슬을 지낸 아서구의 아들로 영덕군 창수면 불암골에서 태어났다. 불암골은 까치소라고도 불리는데 지명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집이 가난해 세금을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관리가 나옹의 어머니를 묶어서 관가가 있는 영해로 데려오는데 못가에서 해산을 하게 됐다. 관리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낳은 아이를 버려두고 영해부로 데려왔다. 부사가 피묻은 치마를 보고 놀라 즉시 풀어주었다. 어머니가 아이 낳은 자리로 돌아와 보니 까마귀와 까치가 날개를 펼쳐 덮어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나옹이다. 그런 연유로 그 자리를 까치소라 하였다.

나옹은 20살에 출가한 뒤 회암사에서 수행을 거듭하다 원나라에 유학을 가 지공스님의 문하가 됐다. 고국에 돌아온 뒤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왕사가 됐다. 송광사 신광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양주 회암사에서 중창불사를 일으키는 등 불법을 증흥하는데 힘을 쏟다가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그는 어려운 불교를 대중화 하기 위해 300수의 게송을 남겼는데 오늘날 우리 가슴을 울리는 명시 '청산은 나를 보고'도 그 중 하나다.
▲ 나옹의 당호를 따 반송정 앞에 지은 육각형의 작은 정자 강월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후략-



나옹화상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옹을 기려 세운 반송정과 나옹이 창건했다는 장육사가 영덕 창수면에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을 지나 영해 송천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918번 지방도와 연결된다. 영양방면으로 10분 정도 달리면 창수면 신기리 삼거리가 나오는데 반송정이 거기에 있다.

나옹이 태어났다는 까치소에서 차로 1분 거리에 있다. 영덕군이 2011년 나옹을 기려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의 팔작지붕인데 2층 누각으로 지었다. 현판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스님이 썼다. 기문은 당시 불국사 주지였던 성타스님과 세계문화예술발전중심회장 초당 이무호씨가 작성했다. 기둥에는 나옹을 찬양하는 주련이 붙어 있다.



지혜롭고 명철함이 천추에 빛나고

부처님의 밝은 등불 만고에 밝혔네

용틀임 푸른 반송 밝은 달을 머금었고

푸르른 대나무는 맑은 바람 띠었도다



나옹화상은 20살에 친구가 죽자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품고 집을 떠난다.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도 못했다. 집 나오면 가출이요, 불문에 들면 출가다. 그는 집을 떠나올 때 반송 소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나왔다는데 정자가 선 자리에 지팡이를 꽂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어머니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저는 살아 있을 것이고 죽으면 저는 죽은 것으로 아십시오."

나무는 잘 자라 마을의 수호신이 됐다. 높이가 수십 척이 됐고 너비가 몇아름이나 큰 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나옹이 큰 스님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반송정이라고 했다. 마을 전체를 반송정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겪은 뒤 1965년 고사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세운 정자가 지금의 반송정이다.

반송정 앞에는 육각형의 작은 정자 '강월헌(江月軒)'도 함께 세웠는데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다. 나옹이 회암사에서 거처하던 방 이름이 강월헌인데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정자로서 강월헌은 본래 여주 신륵사에 있다. 나옹은 생의 마지막을 신륵사에서 보냈는데 절의 삼층석탑 옆 남한강이 흐르는 강가의 누대에 거쳐하다 입적했다. 신륵사는 나옹이 입적한 누대를 '강월헌'으로 이름했다. 달을 품은 달, 강에 비친 달.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다산 정약용, 택당 이식, 읍취헌 박은 같은 조선의 문사들이 해질녘이나 달밤에 이곳에 올라 음풍농월하며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나옹이 입적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나옹보다 8년 늦게 영덕 외가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은 나옹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기록이 '선각왕사비'이다. 선각은 나옹의 호이며 왕사는 공민왕의 왕사라는 뜻이다. 기록은 입적하던날 여흥군민들이 신륵사 뒷산인 봉미산을 뒤덮고 있는 오색구름을 보았다고 했으며 나옹이 타고 다니던 백마가 사흘 전부터 풀을 뜯지 않고 목을 빼 슬피 울었다고 적고 있다. 또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 사방 수백보에 이르는 곳에만 비가 내렸으며 사리가 155과가 나왔는데 그 앞에 향을 사르고 경배를 하자 588과로 쪼개 졌다고 적고 있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구도의 길을 떠났던 그는 56세의 나이로 여주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800년쯤 지나 영덕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지팡이 꽂았던 땅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남겼으니 이 또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의미가 있다.




▲ 고려말 공민왕 때의 나옹선사가 1355년에 창건한 고찰 장육사는 운서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 가볼만한 곳-장육사

운서산 장육사는 나옹화상이 창건한 절로 불국사 말사다. 반송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운서산은 구름이 쉬어가는 산이라는 뜻이다. 수직으로 치솟은 산,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봉우리, 그윽한 산내음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푸른 산 중턱에 흰구름이 걸려 있는 광경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저절로 몸과 마음의 힐링이 이뤄지는 기분이다.

이맘때를 옛어른은 '녹음유초승화시'라고 했다. 눈부신 푸르름과 그윽한 풀내음이 꽃보다 좋을 때라는 말이다. 장육사가 딱 그 말이 들어맞는 곳이다. 이절의 선우스님은 절에서 보면 앞에 늘어선 산들이 연살처럼 절을 둘러싸고 있어 더 없이 아늑할 뿐만 아니라 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명당이라고 말했다.

대웅전과 관음전을 지나 이 절의 맨 위쪽에 있는 암자, 홍련암이 나옹화상이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하던 곳이다. 지공화상과 나옹화상, 무학화상 3대화상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좌상은 경이롭다. 빼어난 예술성에 감탄하고 조성 기술에 탄복한다. 건칠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 가루를 발라 묻힌 뒤 진흙속을 빼낸 조소기법이다. 그 보살상 위에 10년 쯤 지나 다시 금칠을 했다고 한다. 보물 993로 지정됐다. 대웅전내 칠성탱화와 영산회상도, 지장보살도 등 문화재가 볼거리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