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규모와 보존 상태가 가장 빼어난 서원
“백성 구휼, 전쟁 창의, 학문 탐구는 선비의 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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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서원 승현사

대구시 중구 봉산동 230-1번지, 지금의 제일중학교 터는 본래 연구산이었다.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이 어느 따뜻한 봄날 이곳에 올라‘구수춘운(龜峀春雲)’이라는 시를 읊었다. 구수춘운은‘거북산 봄 구름’이라는 뜻이다.

龜岑隱隱似鰲岑거북뫼 아득하여 자라산을 닮았고
雲出無心赤有心산에서 나오는 구름 무심한 듯 유심하네
大地生靈方有望대지의 생명들이 살아나기를 모두가 바라노니
可能無意作甘霖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려 하심이라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다.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하늘이 나서서 구원해 달라는 뜻이다. 서거정은 왜 다른 곳 아닌 연구산에 올라 이같은 소망을 노래했을까? 옛날 대구 사람들이 연구산을 대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숭배했기 때문이다.

연구산 정상부에 길이 170cm, 폭 120cm, 높이 60cm, 무게 2t가량의 화강암 거북바위가 놓인 것도 그래서였다. 15세기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등은 연구산 거북바위가 본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구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가져다 놓은 물건임을 증언해준다. 큰 불이 자주 발생하자 두려움을 느낀 대구 주민들이 연구산에 거북 모양의 바위를 얹어놓았는데, 그 뒤로 대형 화재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이다. 깊은 바다에 사는 거북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불을 제압하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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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서원

따라서 대구의 진산에 대구를 대표하는 서원이 들어선 것은 당연했다. 대구 사람들이 구암서원을 세운 것은 서침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정몽주의 제자인 서침은 여러 벼슬을 역임한 성리학자인데, 그가 특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씀
씀이의 소산이었다.

지금의 대구 달성공원 일대는 고려 중엽 이래 달성서씨 문중 소유였다. 세종이 서침에게‘(달벌성이 축조된 서기 261년부터 줄곧 대구 지역의 요새 역할을 해온) 달성 일원의 땅을 나라에서 군사용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서‘그 대신 다른 땅을 주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벼슬
을 내리겠노라.’하고 제안했다. 서침은‘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다만 대구 사람들의 환곡(還穀, 정부로부터 꾼 곡식) 이자를 경감해주십시오.’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서침의 은혜에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당연했다. 1665년, 사람들은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崇賢祠, 대구시 문화재자료 2호)를 세워 서침 선생을 모셨다. 후대 사람들이 서침 선생을 숭모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1971년에는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유허비 인근의 300년 넘은 회화나무에는‘서침 나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2015년에는 달성종합스포츠파크 인물동산에 선생의 흉상이 제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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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은 1718년(숙종 44) 동산동 229번지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한 서거정(1420∼1488)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그 후 이황의 제자로 젊은 날 문명을 떨친 서해(537∼1559), 그리고 서해의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외교적, 군사적 업적을 쌓은 서성(1558∼1631) 두 분도 모셨다.

2008년부터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의병대장이었던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도 모셨다. 서사원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의 의병을 총지휘한 의병대장이다. 대구 선비들은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전역을 망라하는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서사원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사이에 충청도 청안현감 등을 역임했지만 그 이후로는 선조가 여러 벼슬을 내려도 모두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도승지 이민구가 쓴 그의 묘갈명(墓碣銘)에는‘대구의 낙재(樂齋) 서공(徐公)은 숨어서 착한
도를 닦은 선비이다. (중략) 공이 살았던 (달성군) 이천은 금호 하류에 있는데, 산이 서려 있고 물이 고여 있어 어진 이가 숨어 살기에 적당 한 곳이다. 푸른 솔이 집을 둘러싸고 집안에는 정결한 대나무와 향기 높은 매화가 가득하였다. 공은 거닐면서 해를 보내고 책과 뱃놀이로 즐거움을 삼았다. (중략) 매월 일정한 날에 학사(學舍, 이강서원의 전신 선사재)에 나아가니 (중략) 근방의 뛰어난 수재들이 다투어 와서 학업을 닦아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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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은 1788년(정조 12), 경례재(동재)와 누학재(서재)가 세워지면서 면모가 두드러지게 갖춰졌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때의 훼철과 1924년 중건 등을 거쳐 1996년 지금 자리에 다시 웅장하게 들어섰다. 문화재청은‘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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