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에게 받은 만파식적과 옥대 신라 천년 태평성대 초석 다지다

▲ 신라 31대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경주 이견대가 에메랄드빛 동해와 어우러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다. 왕위에 오른지 한달 만에 장인인 김흠돌의 난을 제압하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여전히 불안요소는 남아있었다. 삼국이 통일된지 5년이 지나도록 백제와 고구려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 여전히 수면 밑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신라건국 이후부터 수백년 동안 괴롭혀온 왜구의 준동도 두통거리였다.

실제로 즉위 3년차에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문 장금이 지금의 전북 익산에서 반역을 꾀하다 사형당했다. 대문 장금은 보덕국왕 안승의 조카인데 보덕국은 문무왕이 고구려유민을 달래기 위해 세운 나라다. 그 보덕국왕 안승의 조카가, 고구려 유민이, 백제땅에서 난을 일으키려했던 것이다. 신문왕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5소경을 정비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 나아가 외경심을 불러 일으킬 신선한 소재가 필요했다.

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그리움과 예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지도 모르겠다. 문무왕 집권시기부터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매사 두통거리였던 김흠돌을 처형한 신문왕은 이듬해 682년 감은사를 완공한다. 문무왕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대본리 바닷가 인근에 세운 이 절은 당초 진국사라고 이름붙였으나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문왕이 이어 마무리하고 이름을 감은사로 바꿨다. 평생 전쟁터를 떠돌며 삼국을 통일한 아버지다. 그 아버지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며 양지바른 왕경을 두고 물결 거친 동해의 바위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라고 유연을 남겼고 실제로 대왕암에 수중릉을 만들었다.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 신라 선덕 여왕 12년(643)에 창건한 기림사.


삼국유사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됐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중략)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해둔 곳은 대왕암이고, 절이름은 감은사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했다."

왕은 감은사가 완공된 다음해인 683년에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대왕암을 찾기 위해 왕궁을 떠났다. 아버지의 위업과 김유신의 국민적 신임을 이어받을 장치가 필요했다. 왕의 행차는 그렇게 이뤄졌다. 월성을 떠나 모차골 수렛재, 불영봉표, 세수방, 기림사, 감은사를 거쳐 이견대로 가는 길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왕의 길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다. 추령재를 짓쳐 오르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비교적 평탄한 우회도로를 택한 것은 왕의 수레가 가빠른 산길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의 행차는 682년 5월 7일 이견대에 도착했으나 비바람이 치고 천지가 진동하는 바람에 16일에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에 있는 산에 들어가 용으로부터 대나무와 옥대를 얻어서 돌아온다.

삼국유사 '기이 제2 만파식적'편에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를 받들어 바친다. 왕이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는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해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한 감은사.


신문왕은 대나무를 베어 바다에서 나온 뒤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에 보관했는데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옥대는 용의 압축파일이다. 옥대의 장식을 시냇물에 넣기만 하면 용이 돼 하늘로 승천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즉 효소대왕)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 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은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돼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됐으니 그 못을 용연이라고 불렀다.

이견대와 대왕암은 감은사를 꼭지점으로 호국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 신문왕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뒤 죽어서도 호국의 용이 돼 바다를 지키겠다는 아버지 문무왕에 대한 극진한 예우와 이견대 신화를 통해 정국주도권을 장악했다. 김흠돌의 난에 참여했던 화랑도를 폐지하고 국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또 녹읍제를 페지하는 대신 관료제를 실시했으며 9주 5소경제를 실시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반란에 대비했다. 이견대 신화가 '탑탑안행 사사성장' 하한 신라 태평성대의 초석이 된 셈이다.

▲ 용이 승천하며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용연폭포.

신문왕이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었던 이견대는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있다. 경주시내에서 감은사지를 지나 곧바로 바다쪽을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감포쪽으로 좌회전하면 도로 중간 언덕배기에 폐교가 된 대본초등학교가 있고 그 아래 바다쪽에 이견대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형태로 건축됐다. 발굴당시 초석을 근거로 정자를 복원했다고 하나 정자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흘러 나오고 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 안에서 내려다 보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견대와 대왕암 사이를 갈매기들이 빠르게 비상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대왕암은 장엄하고 경이롭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바다로 뛰어든 문무왕이다. 대왕암은 그 자체로 용처럼 위풍당당하다.

이견대는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따왔다고 한다. '비룡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는 뜻이다. 신문왕이 이곳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의 명을 받은 용을 만나 만파식적과 옥대를 얻은 곳이니 그 이름에 값할 만하다.

정자 안에는 여러 편의 누정시가 걸려있는데 그 중 성호 이익의 시가 눈에 띈다.



아비는 아들생각, 아들은 아비생각

산천이 가로막혀 정신이 혼미하다.

아비는 아들 만나고 자식 어버이 뵈오니

별들이 이 높은 누대에서 만났구나

(중략)

왕은 기뻐서 말했다. 지금껏 이 나라에 주인이 없어서

정성으로 빌었더니 신명이 통했구나

나라의 원량이 꿈 이룬 기쁨에 춤추고

백성들 노래와 환호소리에 떠들썩 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계림 천년의 기틀이

빛나는 왕업 이로써 무궁토록 전하리라

성호 이익의 시 '이견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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