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얼마나 무서운데…정신 차려야"

▲ 국가유공자 91세의 김정수옹.
상이군인 91세의 고령의 김정수 어르신의 하루일과는 보훈회관이 전부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예천군 개포면 우감리 정류장에서 8시 20분이나 11시 차로 예천읍에 있는 보훈회관을 매일 간다.

이곳은 유일하게 말벗들이 있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전우와 10원짜리 고스톱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4일 오후 4시 30분 김정수 어르신씨 댁을 방문했다.

'국가유공자댁 김정수' 라는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집안은 폐박스가 한쪽에 모여져 있었고, 인기척에 사랑채에서 어르신이 나와 반겨 주었다.

방안은 날이 더운데도 아직도 전기장판을 사용하고 계셨다. 91세의 고령인데도 60대 중반 쯤으로 보일 정도로 밝고 건강해 보였다.

혼자 살고 계셔서 그런지 집안에는 옷들이 널부러져 있고, TV소리를 크게 해놓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노인이 혼자 살다보니 집안이 이래요. 아무데나 앉아요"라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우리들만 전쟁의 고통을 겪으면 됐지 "라고 손사레를 쳤다. 이어 "정신 차려야 돼, 잠시라도 방심하면 나라를 잃어 그리고 가족 다 잃고…"라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 김정수옹은 대구수성국민학교 신병 훈련소에서 16일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8사단 21연대 3대대에 배치돼 치열한 격전지인 양구전투에 참여했다.

고지를 지키려는 아군과 탈환 하려는 인민군과의 전투는 장장 2달여 간에 걸쳐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유명한 양구전투다.

김 옹은 "12월 쯤 됐을거야. 눈이 하도내리고 땅이 얼어서 고참 들이 참호능선을 만들라고 지시를 했는데 땅이 파지지 않아 배를 땅에 대고 흙을 녹이고 삽질을 했었지"라며 "인민군보다 동장군이 더 무서웠지. 1개분대가 33명 정도 됐어. 전투에 나가면 거의 돌아오지 못 했어.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부상으로 이송이 됐지.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이었다. 전우들 끼리도 서로 얼이 빠져 말도 잘하지 않고 참혹했지"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김 옹은 전투가 가장 치열해 진 1951년 야간 전투에서 적의 포탄 파편이 옆구리에 박혀 크게 부상을 입고 양구에서 응급조치 후 대구도립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밤이였지 옆에서는 전우가 쓰러져가고 순간 펑 하는 소리에 뭔가 옆구리에 깊숙이 박히는 느낌을 받고 정신을 잃었지. 깨어나니 후방 대구의 병원이였지"라고 중상을 입었을 때를 기억했다.

또 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퇴각을 하면서 김 옹도 울산병원으로 옮긴 후 1953년 휴전이 되면서 대구동래병원에서 제대했다.

제대 후 광산에서 막장일과 학교 소사 등 닥치는 대로 안해 본일이 없다는 김 옹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늘 일을 할 때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며 "일을 하다보면 상처 난 부위가 아파오고 궂은 날은 쑤시고 저려도 일자리를 잃을 까봐 참았다"고 말했다.

김 옹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보훈수당으로 120만원 나오고 있어서 정부에 늘 고맙개 생각해. 그런데 논 100마지기, 밭 200마지기, 소 100마리를 키우는 사람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노령연금을 받고 있는데 보훈 수당을 받는 다고 노령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우리같이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해주는 대우는 아닌 것 같다"며 "정치인 장관들이 이런 것은 좀 알아야 돼"라고 말했다.

홀로 지내는 김 옹은 오늘도 보훈회관에서 전우들과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고 집으로 귀가한다고 했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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