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국 역사 전개 과정 비교하며 읽기

삼국유사의 첫 째 권인 '왕력(王歷)'은 하나의 도표양식으로 되어있지만, 중국과 신라·고구려·백제·가락의 5개국의 왕조와 군왕의 약사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나름대로 가치가 크다는 것은 전 회에서 밝혔다. 5개국의 흥망이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있으므로 서로간의 역사진행의 과정을 비교하는 것도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역사를 중심으로 그 당시 중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고 중국대륙의 큰 사건을 기준으로 그 시대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었느냐를 비교해보는 것은 재미도 있지만 매우 유익하다.

예를 들어, 신라에서 박혁거세가 즉위할 때 한나라는 선제(宣帝)시대였는데, 선제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선제는 집안이 멸문한 후 민간에서 어렵게 자라 황제가 된 인물이다. 겉으로는 유교를 표방하고 속으로는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입각한 엄한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시책을 많이 펴고 대외개척으로 한나라를 중흥시킨 명군으로 평가된다. 다만 세자인 원제(元帝)가 유교를 너무 좋아한다고 장차 한실(漢室)이 쇠퇴하리라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 한나라는 원제 이후 쇠퇴하여 마침내 왕망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긴 한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나라를 세우던 무렵, 한나라는 원제 시절인데, 유명한 왕소군(王昭君)의 사건이 일어난다. 흉노의 호한야선우에게 당시 제일의 미녀인 왕소군을 시집보내었는데, 왕소군이 북녘의 추운 나라에서 비파를 타며 고국을 그리워하는 야윈 모습을, 후세의 시인 동방규(東方규)는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온조왕이 즉위하여 삼국이 정립하였을 때, 중원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한나라 성제(成帝)가 허리가 가늘어 성제의 손바닥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조비연과 장안의 태액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흐리멍텅한 성제는 유향(劉向)의 간곡한 충고를 듣지 않고 왕씨 일가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등장할 무렵, 중국은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광무제가 후한을 세운 직후였다.

중국을 기준으로 비교해도 의미가 있다. 안녹산의 난으로 당나라가 초토화되고 이백과 두보가 비분강개하던 시절, 경덕왕의 신라는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노래하고 있었다. 황해 하나 건너, 민생이 너무나 비교가 되는 순간이다.

일연선사는 혜안을 갖춘 도인이지만, 전문적인 역사가는 아니다. 그리고 삼국유사가 본격적인 사서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역사기술에 허점도 있다. 일연은 대체로 담담히 당대인들의 평균적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역사학에서 사관(史觀)과 판단기준이 중요한데,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래, 후세 역사가의 입장에서 상벌을 행하는 포폄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치열한 부분이 중국 삼국시대의 정통론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였지만, 주자의 통감강목과 강지의 소미통감은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본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왕력은 중원을 차지한 조위(曹魏)를 표준으로 했다. 그리고 위진남북조시대는 동진과 남조의 정권을 정통으로 내세웠다. 아마 당대의 상식적인 견해 같다. 이처럼 '왕력'을 잘 활용하면 삼국시대 동아시아역사의 큰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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