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음은 겸손한 자세 만들지만 익숙함은 남을 무시하게 돼 중년의 안정감 곧 나의 숨은 적

작년 여름에 14년 탄 승합차를 한 단계 높은 휘발유 승용차로 바꾸었다. 마침 그 때는 특별히 돈 들 일도 없는데다가 빚도 청산이 됐고 둘째 아이도 혼처를 정했기 때문에 마음이 푸근해졌던 시점이었다. 막상 타보니 승용차의 승차감은 승합차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휘발유 값도 떨어져 생각만큼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겨울과 봄을 거치며 내장된 최신 자동차의 설비들은 운전자의 피로감을 극도로 줄여줘 장거리 주행도 따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웬만한 먼 길 운행은 이전의 승합차 운전보다 도착시간이 점점 빨라져 '역시 좋은 차는 제 값을 하는구먼! 이래서 사람들이 괜찮은 차를 구입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달 전부터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위세를 꺾으려고(?) 그 통지서를 내밀었고 내 어깨는 축 쳐졌다. 그녀의 차를 탈 때면 자기에게 하는 내 잔소리에 보복하려는 그녀의 치졸한 작전인 줄을 알지만 객관적 경고장 앞에서는 달리 대처할 묘책이 없었다. 얼마 전 또 한 장의 통지서가 와 있기에 얼른 우편함에서 끄집어 내 인터넷지로를 통해 납부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한 번이 아니라 더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회를 해보니 4월 이래 네 차례나 되었다(아내가 이 글을 읽지 않기를!).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성능이 좋은 차에게 있다. 소리 없는 엔진은 엑셀레이터에 민감하게 반응해 속도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과속의 책임은 운전자이지, 그 차가 아니다. 과속 의지가 그 원흉이다. 과거 승합차 시절에는 속도감 때문에, 또 차의 상태를 염려해서 늘 조심운전을 했었다. 집 안팎에는 여러 가지 생각할 일들이 많아 긴장하며 살았었다. 그러다가 차를 바꾸는 것을 계기로 중년의 안정감이 찾아들면서 방심하는 생활모드로 급격히 바뀐 것이다. 은연중에 내가 하는 것은 좋고 또 바람직한 것이라는 안일한 의식이 자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내가 경험한 것은 내게 익숙한 것이고, 또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근거 없는 위험한 확신에서 출발한다. 이 확신은 나 자신에게서 더 배우려는 의지를 실종시키고 남과의 대화를 가로막는다.

한 마디로 익숙함은 편안해서 좋지만 주변의 것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나쁘기도 하다. 중년의 사람들의 태도가 닫혀 있고 자기의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는 태도는 바로 이 나쁨의 증거이다. 남을 인정하는 것은 나와 다르다는 낯설음에서 시작된다. 이 낯설음이 곧 상대를 알고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만든다. 겸손에서 지식은 싹트고, 지식은 곧 배우는 사람들의 새로운 힘이 된다. 반대로 익숙함은 남을 나의 남, 내가 아는 그런 남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객관적 남은 내가 아는 주관적 남과는 다르다.

배움은 곧 남에 대한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이 용기는 결국 안정된 자기 자신을 고치겠다는 긴장된 각오, 안정감을 포기하겠다는 결의에서 나온다. 이런 배움의 결과가 바로 지식이고 그것은 새로운 힘이 된다. 아는 것은 힘이다. 이제 나도 다시 승합차를 몰던 때의 낯설음의 긴장감을 회복해야 겠다. 그래야 내 주머니의 푼돈이 경찰청 범칙금으로 이전되는 일이 적을 테고, 무엇보다도 아내 앞에서 자존심 상하게 주억대는 계기를 차단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잠시 느낀 중년의 안정감은 나를 범인으로 만드는 숨은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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