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울 때 찾으면 안녕 도모할 수 있는 힐링 안식처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문경읍 고요리 마을 전경

경상북도 문경은 산세가 수려하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자연적인 방어요새다. 고려 공민왕이 몽진(蒙塵)할 때 문경의 조령을 넘어서야 안심 했을 것이다. 10만여 홍건적에 의해 개경이 함락된 1361년 11월, 파주 충추 문경 예천을 거쳐 안동에서 두어 달 간 임시 조정을 경영했다. 문경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찾으면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고 문경이 가기 험난한 두메산골이 아니다. 문경 부근은 남한 땅의 중심이다. 산림청에 의하면 황장산은 휴전선 이남 백두대간의 중심이란다. 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IC)로 길이 훤하게 뚫려 있다. 중부내륙선철도(서울-이천-충주-문경) 문경구간이 2021년 완공 되면 승용차 없이도 서울과 한 시간 이내의 거리다.

가은읍 갈전리에서 본 안산격인 아름다운

그 중에서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 요성리는 정감록의 십승지에는 들지 못하나 귀촌이나 힐링의 땅으로 손색이 없다. 가보면 살고 싶은 땅이다. 신(新)십승지라고 할 수 있다. 새재IC에서 8km(12분), 곧 생실 문경철도역(마원리)에서는 6km(10분)거리다. 조선시대 원(院)이 있던 마원리는 신유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모여든 기독교 신자들이 살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30여명이 순교한 카톨릭 성지.

고요리는 사방이 명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백두대간의 대미산(1,115m)에서 분기(分岐)하여 운달산(1,100m)을 거쳐 뻗어 내려오는 운달지맥의 단산(959m)을 주산으로 마을 앞에는 조령천 상류가 되는 맑은 신북천이 흐른다. 단산의 용맥이 힘 있게 내려오고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남향촌이 아니지만 지세가 넓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다.

고요리에는 현재 골프장과 리조트,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는 펜션촌으로 머무르는 관광촌이 됐다. 문경시에서 운영하는 문경리조트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북면과 문경읍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단산 정상의 활공장에는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앞으로 문경시에서는 고요리를 한국의 힐링처로 개발할 계획이다. 문경천문대가 설치된 단산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는 모노레일, 아리랑마을, 단산 700m 둘레길 등을 계획하고 있다.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과 국보급 아리랑 대장경을 보유한 아리랑 중심도시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을 세계적 관광도시로 키워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다.

가은읍 갈전리

‘하늘을 비추는 촛불명당’ 이란 뜻의 ‘조천납촉(照天蠟燭)’ 등 문경은 곳곳에 명당자리가 산재해 있다고 풍수지리학 석사인 이호준 문경시 문화예술회관장은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책사로 온 두사충은 두보의 후손으로 명(明)나라의 풍수지리 대가다. 명군과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이 때 귀국하지 않고 귀화한 사람이 왜장 김충선과 명군의 두사충이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가 일본군에게 대패한 것이 벽제관전투다. 이여송이 패전한 책임으로 자신의 지리참모 두사충을 참수 하려고 하자 당시 우의정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의 구명으로 두사충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성재권 대구한의대 풍수학 외래교수의 전언이다. 두사충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가은읍 갈전리(아호동)에 약포의 집터를 잡아준다. 정탁 같은 정승이 세사람 더 나올 땅이라는 것. 약포는 이 집터를 보려고 평복에 하인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던 중 주막에서 “백성들은 앞으로 약포 대감집 짓는 부역에 큰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민심을 귀동냥하게 됐다. 약포는 단념하고 한양으로 되돌아갔다가 은퇴후 고향 예천 고평리에 초옥을 짓고 살았다.

두사충이 지목한 문경시 동로면(적성리 및 생달리) ‘연주패옥(蓮珠佩玉)형’의 명당. 정탁에 대한 보은으로 신후지(身後地,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로 정탁의 종에게 알려주었다. 옥녀가 화장을 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벗어놓은 형세를 말하는 연주패옥은 조선의 팔대명당 중 하나라고 전하는 음택 명당. 후일 그 종이 반송 부근에 와 정탁의 아들에게 명당을 가리키며 신후지지를 말하려는 순간 타고 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천하의 명당을 잃게 된 아들은 말의 목을 베어 묻었다고 하는 곳(동로면 적성리 965번지)에 노송과 말무덤(馬塚)이 있다.



문경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출생한 가은읍 일대에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귀농 귀촌 인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광산이 개발됐고 한 때 인구가 2만2천여명까지 이르렀으나 현재 2천176명이다. 1994년도 폐광한 은성광업소 부지에 건립된 석탄박물관은 석탄산업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영강을 따라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잇는 기름진 옥토가 널려있다. 특산물로는 벼, 사과, 표고, 감식초, 칡즙, 방짜유기가 유명하다.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 견훤유적지, 봉암사 등 역사, 문화적 관광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경에는 조령과 함께 하늘재(계립령, 鷄立嶺)가 있다.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고개(높이 525m)로 명승 제49호. 포암산(베바우산,963m)과 탄향산(851m) 사이다. 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 왕(이사금)이 북진을 위해 개척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2년 뒤인 158년에 뚫은 고갯길이 풍기 죽령(대재,689m). 하늘재 부근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기 이전에는 하늘재와 죽령은 거점 교통로였다. 임진왜란 이후 새재에 방어를 위한 관문을 설치하면서 새재길은 동남으로 가는 제1의 도로가 됐다.

하늘재는 신라 경순왕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패망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마의태자는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 분지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신라의 차기 왕인 마의태자가 935년 부왕(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친 것에 반대해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늘재를 넘자마자 나오는 중원미륵사지(사적 제317호)에 오층석탑(보물 제 95호), 석불입상(보물 제 96호)이 그 전설을 머금고 있다.

하늘재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미륵리 쪽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은 숲길이다. 숲 속의 지저귀는 새소리는 삶을 노래하는 듯이 들린다.

아름다운 하늘재 가는 길을 걸으면 마음이 절로 붙잡힌다. 여름산은 정말 활력이 넘친다. 산에서 나오는 좋은 공기를 마시며 심연이 정화되는 힐링처다. 산록의 푸르름은 보노라면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계관시인 테니슨 의 라는 시에 나오는 여름 ‘Rich’처럼 풍부함을 실감한다.

문경 관음에서 충주 미륵으로 가는 하늘재 길은 현생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관음은 관세음보살을 굳게 믿으며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앙.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 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불자들에게는 “죽어 천국, 살아 행복”이다. 나무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담당하는)아미타 부처님께 귀의(의지)합니다”, 즉 “미래에 극락세계로 가게 해 주세요” 라는 뜻이고, 관세음보살은 “현재 괴로움을 없애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하늘재는 마의태자에게 망국의 한을 씹으며 잃어버린 설움을 달래는 길이었지만 현대의 도보 여행객들은 인생을 반추해볼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하늘재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처럼 세계의 도보여행자들이 찾아오는 명품 도보여행 콘텐츠로 만들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충주시와 문경시가 공동으로 개발하면 지역 경제에 파급은 덤으로 일어날 것이다. 정기조 여행 작가는 “계립(鷄立)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계림(신라)을 세웠다(立)는 의미인 같다. 하늘재는 아름다운 역사 문화자원도 있고 숲길, 풍광, 자연, 생태적인 부분들까지 한꺼번에 향유할 수 있는 한국판 산티아고 길”이라고 말했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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