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0년(선조 33)에 건립된 건물로 입암리와 입암서원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선바위와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인듯 절경을 뽐낸다.
포항에서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타다가 서포항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꺾으면 기계면이다. 기계면을 지나 20여분 이상을 달리면 죽장면 사무소가 나오는데 죽장면 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곧 입암서원이 보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사천 맑은 물이 흐르고 계곡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가 있다. 입암서원과 입암리 명칭의 유래가 된 입암, 선바위다. 선바위 뒤 기암절벽에 기대어 세워진 정자가 일제당이다. 맑고 푸른 물, 그 위에 우뚝한 선바위 기암절벽과 푸른 산을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일제당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 경물이 됐다.

입암서원은 여헌 장현광을 주벽으로 하고 입암사우立巖四友, 동봉 권극립 우헌 정사상 논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을 배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입암서원과 일제당에서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입암에 제일먼저 들어온 이는 권극립과 손우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난을 피해 경치 좋은 입암에 터를 잡았다. 3년 뒤 청송에서 피신하고 있는 여헌 장현광을 찾아가 입암의 경치를 이야기 하고 놀러올 것을 권유했다. 그해 여름 장현광이 정우헌 정수암 형제와 입암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돼 눌러 앉고 말았다.

장현광은 학문이 뛰어났지만 호방한 사람이었다. 그의 호 여헌 旅軒은 평생을 나그네(旅)로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하늘과 땅으로 집을 삼고 해와 별로써 창을 삼으며 다섯 산마루로 침대를 삼고 네강으로 술항아리를 삼았네 이 가운데 크게 취한 한 사나이가 술깬 감회를 표현하고자 기둥까리 같은 붓을 잡았네”라는 시를 써 남아의 기개를 펼쳐보이기도 했다.

장현광이 입암에 들어온 사연이 재밌다. 장현광은 그때 마흔세 살이었다. 그는 그전 해 가을에 류성룡의 추천으로 보은현감에 임명됐다. 그런데 석달 만에 병이 났다. 사직원을 올렸지만 충청감사가 받아주지 않았다. 사표를 받아주지 않자 무작정 벼슬을 때려치우고 보따리를 쌌다.이 일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그는 청송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권극립이 찾아왔다. 입암으로 들어가자고 유혹했다.

입암에 눌러앉게 된 장현광은 흰 돌에 나이 순대로 권극립 손우남 정수암 정우헌 등 네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돌을 바위 굴에 묻은 뒤 청유(세속을 떠난 깨끗한 생활)의 약속을 맺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입암사우 立巖四友’라 불렀다. 다섯 집의 가족이 입암의 절경을 보고 집을 짓고 살았으니 요즈음으로 치자면 물좋고 산좋은 정원에 ‘동호인주택’을 지은 셈이다.

장현광은 입암사우의 요청에 따라 입암을 중심으로 한 바위와 연못 봉우리 나무 절벽 등 28곳에 입암촌, 계구대 학욕담 등으로 이름을 붙였으니 ‘입암28경’이다. 입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도 장현광이다. 장현광은 또 자기가 이름붙인 경물에 대해 13수의 시를 썼는데 ‘입암13영’이다.

산은 낙문산 뒤에 있는데
이곳에 학욕이란 못이 있다오
학 또한 영물인데
그림자 끊기니 언제나 한번 목욕할까

-학욕대鶴浴潭-

임진왜란이 끝나자 장현광과 사우는 제각기 귀향길에 올랐는데 권극렴만 입암에 살면서 이 일대 솔안마을이 안동권씨의 세거지가 됐다. 이 때문에 입암서원과 일제당은 권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장현광은 40년 뒤에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국치를 당하자 모든 걸 내던지고 다시 입암으로 돌아와 살다가 1년만인 1637년 세상을 떠났다. 장현광이 입암에 머무를 때에 왕래가 잦았던 이는 대한민국 가사 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자원하고 40대에 들어서 무과에 급제한 박인로는 수시로 입암에 있는 장현광을 찾아 묻고 답하며 학문을 닦았다. 박인로는 그의 나이 69세가 되던 해 장현광이 입압의 경치에 이름 붙인 ‘입암 28경’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입암29수’다. 시가 29수인 이유는 28경에 서시를 더했기 때문이다.

무정히 서있는 바위 유정하여 보이나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불의 어렵거늘
만고에 곧게 선 저 얼굴이 고칠적이 없나다

- 입암 제1수 -

일제당은 입암서원 동남쪽에 있다. 본래는 입암정사였는데 뒤에 일제당으로 고쳐 불렀다.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적벽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에는 선바위가 계곡물 위에 수호신처럼 우뚝 섰다. 일제당은 입암서원의 부속건물로 1600년(선조 33)에 지어졌다.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앉혔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가운데 칸은 마루, 양쪽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 뒷벽에 출입문을 세우고 누마루를 꾸며 계자난간을 둘렀다.
▲ 박인로 입암29수 시비.

자연석 축대 위에는 방이 들어서 있고 마루는 허공 쪽으로 낸 뒤 그 밑을 긴 나무 기둥으로 받힌 구조다. 입암서원, 만활당(萬活堂)과 함께 ‘입암서원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됐다. 1907년(순종 1)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는 의병조직이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입암전투를 벌였는데 일제당은 이때 소실되었다가 1914년 복원되었다.

일제당은 ‘날마다 오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자 안에는 두 개의 방과 감실이 있는데 감실에는 책을 쌓아두고 있었다고 한다. 마루에서는 강론이 이뤄졌을 터. ‘날마다 오른다’는 뜻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동쪽 방은 우란재友蘭齋다. 지란지우芝蘭之友, 난초와 지초처럼 서로 좋은 향기를 내뿜는 친구를 말한다. 장현광과 정우현이 거처했다. 열송재悅松齋는 송무백열松茂栢悅,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이다.손우남과 정사진이 묶었다. 두 현판 모두 입암에 자리를 잡고 사는 장현광과 입암사우, 공부하는 제자가 서로 맑은 향기를 나누며 우의를 두텁게 하라는 뜻 일터다.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가사천은 기대했던 것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뜨거운 부뚜막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이 불편한, 길고 긴 마른 장마 탓이다. 맑고 푸른 가사천은 바닥을 드러냈고 계곡물은 실개천이 돼 뜨거운 김을 푹푹 쏟아내고 있다. 마주보고 있는 구인봉이 아니었다면 산천 어디에서도 선비의 푸른 기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세상은 말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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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 앞에서 보는 입암은 장대하다. 높이 20m 둘레가 15m나 된다고 한다. 알수없는 거대한 힘이 계곡에 큰 바위를 세우고 차례로 일제당을 낳고 입암서원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장현광은 입암을 ‘입탁암 立卓巖’이라고도 불렀다. 논어의 소립탁이所立卓爾에서 나온 말이다. 안연이 공자의 위대함을 말하는 대목에 나온다. “그만두려고 하나 그만 둘 수 없어서 내 재능을 다하려 하니 우뚝 서 있는 듯하여 비록 좆고자 하나 따라갈 수 없을 뿐이다.” 따라서 입암을 ‘탁입암’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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