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흥망성쇠엔 기운·징조 따른다

전회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성인(聖人)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연선사도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의 건국을 이야기하려는 일연으로서는 신기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를 세워 수백 년간 사직이 계승하는 대업을 이룬 영웅에게는 반드시 일반사람이 경험하기 힘든 하늘의 도움이나 신비한 일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연은 다음과 같은 유창한 문장으로 이 사실을 변명한다.

"제왕(帝王)이 장차 흥할 때 부명(符命)이나 도록(圖?)을 받아 반드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고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와 은나라의 시조인 설(契)과 주나라의 시조인 기(棄)의 탄생신화를 예로 든다.

일연선사의 말과 같이 제왕이 일어나 천지변화의 대운을 타고 대업을 이루려면 어떤 징조나 기운이 먼저 나타나는 법이다. 해가 뜨려면 먼저 동녘하늘이 불그레 훤해지고 해가 장차 넘어갈 때 서녘하늘이 곱게 물들 듯이 말이다. 중용에서 말했다. "국가장흥(國家將興) 에 필유정상(必有禎祥)하며 국가장망(國家將亡)에 필유요얼(必有妖孼)이라,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상한 조짐이 있다."라고.

박혁거세가 탄생함에 우물가에서 천마(天馬)가 나타났고 알영부인이 태어남에 우물에서 용이 나왔다. 세종대왕은 정인지·권제·안지를 동원하여, 조선왕조를 이룩한 여섯 영웅을 해동육룡(海東六龍)으로 비유하는 용비어천가를 제작했는데, 구절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신기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종은 임금이기 이전에 유교의 대학자로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는 규범을 모를 없건만, 국가의 창업에 관계된 일에는 신이(神異)를 기술하였던 것이다.

그뿐이랴? 용비어천가 125장에 악(樂)·가(歌)·무(舞)를 붙인 ‘봉래의(鳳來儀)’란 대곡(大曲)을 손수 작곡하여 선조의 공업을 찬양했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일연은 고조선의 단군왕검, 고구려의 동명왕, 신라의 박혁거세의 신비하고 거룩한 창업설화를 기록하여 고려국민의 사기를 드높임은 물론, 천우신조의 공덕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열어나가는 한민족의 긍지를, 자손 대대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니, 이 어찌 성현의 깊은 뜻이 아니겠는가?

한 국가의 흥망성쇠나 사회변동의 중요한 일에서 발생한 신비스런 이야기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므로 당연히 기록하겠다는 일연의 소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선물이다. 만일 일연선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단조롭고 메마를까?

황하의 그림과 낙수의 글이란 유명한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설화다. 태고적 임금인 복희씨의 황하(黃河)의 용마의 등에서 얻은 그림이 하도요, 하나라 우임금이 낙수(洛水)의 거북의 등에서 얻은 글이 낙서로서 모두 주역 팔괘의 원형이라 한다. 이처럼 신비에 쌓인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의 사적도 모두 사서에 기록되어 유자(儒子)들로부터 존중받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이 사실들을 적겠다는 입장표명은 매우 당당하게 들린다.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연합 kb@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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