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성 가져…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구한 전이갑·전의갑 형제

한천서원
한천서원(寒泉書院)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동로 117(행정리 870)에 있다.

한천서원은 전이갑, 전의갑 형제를 기려 1838년(현종 4)에 세워졌다. 전이갑, 전의갑 두 장수는 918년 동수대전 때 신숭겸, 김락과 더불어 왕건을 구해내면서 장렬히 전사한 고려 개국 공신들이다. 당연히 한천서원의 안내판은 고려 건국과 동수대전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안내판은 ‘이 서원은 고려 개국 공신 태사 충렬공 전이갑과 충강공 전의갑 형제를 배향하는 곳이다. 양 공은 서기 918년에 장절공 신숭겸 장군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였다. 서기 927년(태조 10) 후백제 견훤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여 견훤군과 팔공산 동수에서 대혼전 중에 왕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 김락 장군 등과 의논하여 미복(微服)으로 탈출케 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영명(英名)을 천백세(千百世)에 남기었다. 뒷날 태조가 몹시 슬퍼하여 전이갑은 통합 삼한 개국공신 태사 충렬공으로 추증하고 전의갑은 시중 개국공신 충강공으로 봉하였다’라고 말한다.

즉, 한천서원은 아주 오래된 실화가 깃들어 있는 서원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서원들이 조선시대 선비들을 제사 지내는 것과 견주면 한천서원은 기림을 받는 이의 신분과 시대가 아주 독특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한천서원 강당과 사당이 고려 때 지어진 고건물인 것은 아니며, 처음 지어진 1838년 당시 건축물도 아니다.

우리나라 서원의 대부분이 훼철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것처럼 한천서원도 1864년(고종 1) 시작된 서원철폐령에 휩쓸려 폐지되었다. 그 후 가문의 후손들은 재실을 지어 전이갑, 전의갑 양 공의 높은 충의를 기려왔다. 한천서원이 재실 수준을 뛰어넘어 다시 서원의 위상을 되찾은 때는 1989년이다.

한천서원은 경내 배치도 상당히 특이하다. 보통의 서원은 학생들이 공부도 하고 숙식도 하는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에 있고, 사당이 강당 뒤편에 있다. 그에 비해 한천서원은 동재가 없다. 동재가 없는 까닭은 그 자리에 사당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한천서원은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서원의 여러 건물을 지혜롭게 배치한 선조들의 유연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타계한 분을 모시는 사당과 살아있는 후손들 간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으므로 강당과 사당 사이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서원 영역 안으로 들어서는 대문을 통과하면 뜰이 나오고, 그 뜰을 오른쪽으로 지나면 다시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나온다. 그렇게 내삼문을 거쳐 사당 경내로 들어갈 수도 있고, 또는 강당 앞을 지나 사당 뜰로 들어가는 협문을 이용할 수도 있다. 사당의 이름은 충절사(忠節祠)이다. 충절은 전이갑, 전의갑 두 분의 장렬한 죽음을 상징하는 어휘이다.

한천서원의 특이점은 강당 앞에서도 발견된다. ‘강당’이 아니라 ‘강당앞’이다. 강당은 여느 서원에서 보는 건물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커다란 와가이지만, 강당앞은 어느 서원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고인돌이다. 강당 바로 앞 뜰에 거대한 고인돌이 놓여 있다.

이곳 고인돌은 길이 265cm, 폭 260cm, 높이 45cm에 이르는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의 묘지 유적인 고인돌이 고려 초기의 충신들을 기리는 서원 강당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본래는 받침돌도 뚜렷했었는데 근래 마당을 고르는 과정에서 약간 묻히는 바람에 몸돌과 땅이 약간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곳에 고인돌이 있는 것은 서원 이름과도 연관이 있다. 서원 이름 한천(寒泉)은 곧 냉천(冷泉)이다. 가창면 일대가 좌우로 깊은 산이 버티고 있는 협곡 속 들판이므로 신천 상류의 개울물은 응당 예로부터 차고 맑았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도 가창면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고, 신천 상류의 물을 마시며 살았다. 그 증거가 바로 고인돌이다. 강이 넘쳐도 물에 잠기지는 않는 지점, 청동기 사람들은 그런 곳에 묘소를 설치했다.

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 와중에 대부분 없어져 버렸지만 본래는 고창, 화순, 강화 등지보다도 더 많은 3천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의 도시’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곳이 대구이다. 한천서원의 이 고인돌은 전이갑 장군의 후손들이 서원 경내의 고인돌도 고이 간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한천서원 경내에는 여느 서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또 다른 볼거리가 한 가지 더 있다.

‘대한민국 12대 대통령 전두환 2003년 10월 19일’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기념식수 표지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 옆에는 ‘2001년 3월 10일 경북경찰청장 치안감 전용찬’과 ‘2015년 4월 17일 제16대 전씨 대구지구 종친회 회장 전임효’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기념식수들도 있다.

 

정만진 소설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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