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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형 안동대 교수
나는 청소년기부터 되고 싶었던 인간형이 있었는데, ‘어당팔’이다. ‘어당팔’이라는 모델 선정은 고등학교 시절 합기도 수련 도장에서 이루어졌다.‘어리숙하지만 실제로는 당수가 8단인 고수’의 삶이다. 도장에서 초단이나 2단 정도가 되는 수련자들은 무술 실력을 뽐내었다. 반면에 고수가 되면 오히려 그것을 숨기고 지는 척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고수는 결정적으로 실력을 발휘,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당시에는 이소룡의 무협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작은 덩치로 커다란 서양 사람을 한두 수로 전광석화처럼 평정하는 이소룡의 무술은 가관이었다. 나는 이소룡식의 합기도를 배우기로 하고 도장에 등록하였다.

석 달을 배우니 온몸 구석구석 멍이 들었지만 우러나는 자신감으로 발걸음은 나날이 가벼워졌다. 서너 달 더 지나자 친구들도 내 수련 사실을 눈치챌 정도로 행동거지는 자세가 잡혔다. 수련이 끝나는 밤 시간 동료 수련생들과 괜히 시가지를 활보하면서 시비를 걸기도 하고, 영웅 심리에 골목을 주름잡기도 했다. 이튿날에는 그러나 반드시 사범과 선배들에게 불려가 꾸중과 훈시를 들었다. 그들은 고수의 무도인이었다. 싸움판에 연루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용케도 실상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피해를 줬으면 그들 자신의 짓인 양 우리 대신 잘못을 빌고 화해를 시도하였다. 우리의 형세가 불리해지면 비호같이 나타나 한두 수만에 상대를 제압, 상황을 종료시켰다. 그리고는 언제나 우리에게 훈계했다. ‘어리숙해라. 무도는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막기 위해 쓰는 거야. 피할 수 없을 때만 써야지.’ 그들은 ‘어당팔’이었고, 그때부터 내 소원은 ‘어당팔’ 되기였다.

‘어당팔’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절대로 힘으로써 사람 관계를 하지 않으며 자기를 희생하는 지도력을 가진 평민이다. 그는 치밀한 계산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 그저 순수한 본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또 ‘어당팔’은 누구에게서라도 반드시 장점을 찾아 칭찬하는 긍정의 사람이다. 그는 친밀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지 않는 ‘바보 같은 삶’을 산다. 어당팔은 딴죽을 걸거나 극단적인 비난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다. 모든 일을 건설적으로 합심하는 역할만을 즐기는 존재이다.

그러나 ‘어당팔’은 이런 소극적 면만 갖고 있지 않다.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적극성을 겸비해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일을 되도록 만들고 또 그러기에 충분한 인맥을 쌓은 사람이다. 그는 늘 건설적 모임의 역사를 새롭게 써간다. 순수한 동기만 있다면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세상을 신나게 만들어가는 지도자가 바로 ‘어당팔’이다. 이들의 순수한 동기는 인재 발굴, 자금조달, 인지도 확보, 주변의 호응 등의 난관들을 거뜬히 극복하는 지도력을 자연스레 갖추게 만든다. 내가 다닌 도장의 선배들은 대부분 아무런 편견 없이 상대의 인격을 인정하고, 밥 인심을 베풀며, 우리의 장점을 아낌없이 칭찬하며, 자기들이 말한 것을 실천한 낙관주의적 ‘어당팔’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주변에서 이런 ‘어당팔’을 만나기가 어렵다. 심지어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적 지도자들까지도 쪼잔한 이기주의에 물들어 금도를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언제쯤 우리는 덕과 복을 겸비한 넉넉한 ‘어당팔’들을 만나게 될까. 나의 옛 ‘어당팔’ 선배님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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