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까이서 본 조양각
금호강은 영천 금호읍에서 따온 이름이다. 포항시 북구 죽장면 가사리의 가사령에서 발원해 영천시 자양면과 고경면을 거친뒤 시가지 중심을 관통하며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른다. 금호읍과 경산시를 지나 옛 강창 나루터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옛강창 나루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경계다. 포항 죽장면에서 발원해 낙동강에 편입되기 까지 임고천, 고현천, 신령천과 합세해 몸을 키워 유로 연장이 117.7km에 유역 면적이 2,053㎢이다. 영천의 특산물인 포도와 사과, 양파는 금호강이 주는 선물이다.
조양각 오르는 나무계단

조양각은 금호강이 시가지의 중심을 관통하는 창구동 1-1번지에 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남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금호강의 절벽, 현재의 위치에 지었다. 이용이 정자를 짓던 당시에는 명원루(明遠樓)라고 했다. 왜 누각이름을 이렇게 지었는지 확실히 아는 이가 없었으나 사가 서거정은 ‘훤희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은 듯하다(遠目增雙明)’라는 당나라 명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서거정은 명원루기 기문에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의 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세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야말로 ‘명(明)’이요, 푸른들판 가로 세로 뻗쳐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끝간 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 바 ‘원(遠)인’ 것이다”라며 조양각에서 바라본 영천의 풍광을 명원루 누각 글자를 차운해 썼다.
금호강과 조양각

조양각 안에는 고려와 조선의 스타급 문인들이 쓴 시문으로 가득하다. 포은 정몽주,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사가정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용재 이행, 창건자 이용 등 명현들의 기문 15편과 시 63편이 목판으로 새겨져 빼곡이 걸려 있다.

누각에 가장 먼저 걸린 시는 정몽주의 ‘청계석벽’이다. 외가인 영천에서 태어나 자란 정몽주는 명원루 낙성기념으로 9월9일 명월루에 올라 ‘푸른 물흐르는 암벽’을 노래했다.



푸른 시내와 석벽이 고을을 안고 도는 곳에

새로 다락을 지었더니 눈이 활짝 열리네

남쪽 이랑의 누른 구름 풍년을 알리고

서산의 산뜻한 기운은 아침을 일깨우네

풍류를 좋아하는 태수는 녹봉이 2천석

뜻 밖에 만난 친구 3백잔 술 드세나

밤이 기이 들거든 옥피리 불면서

휘영청 밝은 달 아래 함께 거닐어 보세



명원루는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됐다. 인조 15년(1637)영천군수 한덕급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명원루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고 명명했다. ‘조양’은 ‘시경’의 ‘대아권아 편’에 나온다. “봉황은 동쪽에서 뜨는 아침 햇살(朝暘)에 운다“라는 구절에서 얻어왔다. 영천의 지세가 ‘날아가는 봉황새’ 모양인데 아침햇살에 우는 봉황은 길조라는 뜻이다.
조양각에서 본 금호강

조양각은 강 쪽에서 보면 ‘조양각’ 이고 조양공원 마당 쪽에서 보면 ‘서세루(瑞世樓)’다. 남쪽과 북쪽에 걸린 현판이 다르다. ‘서세’는 한마디로 좋은 세상이다. 봉황이 사는 세상이니 당연히 좋은 세상(瑞世)일 거라고 붙인 이름이다. 영조 18년 (1742)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하면서 서세루라는 현판을 써 달았다. 윤봉오는 조양각의 규모를 확대해 중수했는데 별실을 마련하고 내문을 남덕문, 외문을 곤구문이라 했다. 지금은 별실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았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누각안에는 방이 한칸 있는 팔작지붕 구조다.
조양각 현판
서세루 현판

조양각은 뛰어난 경치 때문에 진주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삼루로 꼽혔고 안동의 영호루, 울산의 태화루, 양산의 쌍벽루, 김천의 연자루와 함께 영남칠루로 불리기도 했다. 조양각에 올라 남쪽을 보면 발아래 푸른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끝 간데 없다는 주남평야가 펼쳐진다. 들판 너머로 채약산이 한눈에 들어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경승지로 꼽혔다. 조선시대에는 그랬을 것이다.

지금 너른 들판에는 쭉쭉 키 자랑하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때문에 채약산 조망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몽주, 이이, 김종직, 박인로 같은 당대의 명현들이 앉아 술마시고 시를 읊은 자리에서 그 시를 불러내 소리내 읽어보는 감흥까지야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박인로는 고향이 영천이다. 그도 조양각에 2편의 시를 걸었다. 그 중 한편이다.



하늘이 만든 기이한 바위위에

사람이 제일가는 누각을 세웠네

밝은 창가에는 황학루의 달이 비쳤고

붉은 헌함에는 악양루의 가을이 다가왔네

땅은 심산의 먼 곳에 접했고

강은 이수의 흐름에 이어졌네

진나라 동자가 만일 이곳을 보았다면

어찌 반드시 영주를 찾겠는가

조양공원

영천시는 조양각 일대를 조양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한국 여성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여류소설가 백신애 표석비, 산남의진비가 있다. 눈길을 끄는 표지석이 하나 더 있다. ‘조선 통신사의 길’ 비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통신사가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가던 중 영천에 머물렀다는 기념비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조양각에서 본 금호강2

조선시대에 영천에서 고을살이를 했던 목민관 21좌 선정비를 모아둔 사현대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비문이 있다. 외할아버지와 손자가 대를 이어 영천군수에 부임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 군수의 청덕비를 세운 것이다.

“나의 외증조부 영의정 만사(심지원 군수의 호)는 원님으로 1년 있으매 후택이 흡족하여 읍민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82년 만에 소자가 또한 여기 고을살이 하매 글자도 희미하게 마태가 끼어서 흠감함을 금할 수 없네. 비각을 짓고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지원은 군수를 지낸 뒤 1년만에 사헌부집의로 발령받아 조정에 들어갔다가 효정때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 영천 사람들의 인심을 두둑히 얻었는지 영천 송곡서원에 배향됐다. 청덕비를 쓴 이는 외증손인 이명희군수로 그도 역시 선정을 하여 청덕선정동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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